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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Dec 18. 2018

수험기간엔 의미가 있을까?

<노량진 역에는 기차가 서지 않는다>를 보고

'노량진 역에는 기차가 서지 않는다'는 7급 공무원 시험을 4년째 준비해온 33세 '희준'의 이야기이다. 고된 수험생활을 하는 이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몇 년 전부터 취업난은 갈수록 심각해져왔기에 젊은 세대라면 희준의 처지에 자신도 모르게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희준의 이야기이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희준은 시험공부과 관련되지 않은 모든 감각을 억누르며 살아간다. 이런 습성은 의식적인 것이라기보다 합격이 절박했던 그에게 자신도 모르게 생겨난 것이다. 그에게 합격은 생의 다른 모든 즐거움을 포기해서라도 얻고 싶은 절실한 것이었다. 그저 끼니를 때우기 위해 컵밥을 씹어삼키는 그에게 연애와 취미같은 공부외의 활동에 쏟을 여력은 없다. 공부와 고시원 방값을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낼뿐이다.


 유하가 나타난 후 희준의 무채색 수험생활은 한층 다채로워진다. 유하의 밝은 성격과 현재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려는 태도는 희준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고있었던 삶의 방식을 스스로 되묻게 한다. 희준은 33세의 무직자라는 협소한 기준으로 자신의 삶 전체를 별볼일 없는 것으로 재단했고 진짜 인생은 합격후에나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유하는 인생이 사회가 요구하는 결과물로서가 아니라 인생 그 자체로서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는 걸 알려준다. 지금 즐기지 않으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리는 인생의 가치를 자신이 사는 모습을 통해 그대로 보여준다. 희준을 혼란케하는건 그녀의 말보다 유하 자체다. 삭막하고 지루한 수험의 나날을 살던 그에게 귀엽고 활기찬 유하는 그 자체로 큰 기쁨이다. 희준과 유하는 때때로 만나며 예상치 않은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낸다.



 하지만 인생은 '카르페디엠'이란 말로 모두 해결될만큼 간단치 않다. 4년동안 하나의 시험을 준비해 온 희준이 이제와서 다른 일을 찾을 수는 없다. 그는 사회와 학원실장이 그토록 요구하는 '결과'를 내야만 했고 남들처럼 떳떳한 직장을 가져야만 했고 자신을 위해 몰래 쌈짓돈과 볶음고추장을 보내주는 어머니에게 보답해야만 했다. 슬프고 잔인하지만 그의 말대로 그는 합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현재의 즐거움을 유보하며 견디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가 고시원에서 소리를 죽여가며 흘리는 눈물에는 버겁고 힘겨운 삶의 조건을 버텨나갈 수밖에 없는 이의 슬픔이 있다. 울음을 멈추고 다시 책상앞에 앉는 희준을 위에서 찍던 카메라가 줌아웃되자 고시원에서 공부하던 수십명의 학생들이 한 화면에 들어온다.


 시험을 두달 남기고 굳은 다짐을 한 희준은 휴대폰을 끄고 공부에만 전념한다. 연락이 닿지 않자 유하는 학원 게시판에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메모를 남기고 희준은 사진의 장소에 시간을 맞춰 찾아간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공원에서 유하는 희준에게 달려와 업힌다. 14살이란 나이차탓에 두 사람다 한 번도 입밖으로 내어 말하진 못했지만 둘은 서로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왜 아저씨의 삶을 살지 않고 남들처럼 살려고 하냐'는 유하의 질문에 '남들처럼 사는 건 내게 중요해'라고 희준은 답한다. 물고기를 놓아주러 함께 바다에 가자는 유하의 부탁을 희준은 거절하고, 두 사람은 밝게 밝게 웃으면서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며 작별인사를 한다.



 시험에 합격한 희준은 함께 시험을 준비하던 동생들과 축하주를 마신다. 윤철은 시험에 떨어졌지만 애써 밝은 내색을 하며 희준을 축하해준다. 4년을 버티며 합격한 게 장하다며 안아주려던 윤철은 오히려 자제력을 잃고 형의 품에서 서러운 울음을 터뜨린다. 함께 공부하던 이들이 한 명씩 합격해서 떠날때마다 자신은 영원히 노량진에 머무르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윤철은 희준의 합격이 무섭다. 희준은 윤철에게 섣부른 위로를 할 수 없단 걸 알기에 그저 가만히 안아줄 뿐이다.



 휴대폰을 켜본 희준은 유하에게 많은 메시지가 와있는 걸 보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지만 연락이 닿지 않는다. 그녀의 아버지가 일하는 수산시장에 찾아간 후에야 유하가 혈액암으로 죽었단 사실을 알게 된다. 유하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고궁에 가서 희준은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그녀의 동영상 메시지를 본다. 한강교에서 듣게된 희준의 슬픈노래에서 위안을 받았다는 말과 처음으로 꺼낸 병에 대한 이야기과 그의 합격을 기원하는 그녀의 이야기가 담긴 영상을 희준은 넋놓고 바라본다. 무심코 그녀에게 쏟아낸 거친 말들이 떠오르고 희준은 못난 자신이 견디기 힘들다.



 부산으로 내려온 희준에게 가족들은 합격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해준다. 아버지가 성공한 사람은 열심히 했기에 성공했고 실패한 사람은 노력하지 않았다는 현실과 부분적으로 다른 가시돋힌 말을 쏟아낼 때 얌전한 그가 평소완 다르게 아버지에게 대든다. '열심히 해도 안될 수 있습니더!' 그는 함께 노력해온 윤철이 자신의 품에서 흘리던 눈물과 절박하게 노력해도 닿을 수 없던 몇 년간의 절망과 자신이 수없이 참았던 혹은 참을 수 없었던 눈물을 기억한다. 억지로 접어야 했던 자신의 마음과 마지막인줄 몰랐던 유하와의 만남을 기억한다. 전혀 뜻밖의 상황과 장소에서 희준의 서러운 울음은 터진다. 왜 항상 뒤늦게 깨닫게 되는걸까? 희준은 유하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희준은 노량진에서의 생활을 정리하는 와중에 유하와 갔던 장소를 차례로 방문한다. 허겁지겁 먹었던 컵밥을 천천히 음미하며 먹어보고 학원 옥상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유하가 무얼 말하고자 했는지 이해한다. 자신의 수험기간이 인생에서 버티고 견디는 소모적인 시간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그 힘겨웠던 시간조차 생의 소중한 일부였음을 깨닫는다. 현재 누릴 수 있는 삶의 즐거움과 현실의 생계를 이어나가는 일의 버거움은 한쪽이 옳을 수 있는 답변이 아니라 함께 품고 가야 할 두개의 질문임을 알게된다. 그는 노량진에서 겪은 일과 만난 이들을 가슴에 간직한 채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이 드라마는 한국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표준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현실과 잣대가 사실은 냉혹하며 비인간적임을 보여준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는 압박속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만큼 살아보겠다고 애쓰지만 하루하루는 고달프고 미래는 불확실하기만 하다.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은 늘 초라하고 부족하게 느껴지고,  '보통사람'이 되는 건 이상하게도 지독하게 어렵다.


 이 드라마를 본다고 해서 우리의 현실조건이 변하진 않는다. 사건을 겪은 후 다시 공부를 하고 직장에 다녀야 하는 윤철과 희준처럼 우리의 버거운 삶은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의 효용은 이야기를 하는 것 그 자체이다. 모두가 힘들다는 관습적인 말의 자장아래 우리는 서러움을 가슴에 묻고 감정을 누르며 삶을 살아간다. 우리에겐 꾹꾹 참아 눌러왔던 고됨을 드러내어 이야기하고 위로를 주고받는 일이 필요했다. 속에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서로의 약함에서 위로를 받고 다소 부족해도 괜찮음을 발견하는 일은 살아가는데 든든한 힘이 된다. 희준의 울음이 우리에게 해준 것은 그런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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