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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Dec 18. 2018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의심

'가족의 탄생-선경 편'을 보고

트렁크를 들고 자신의 집에 찾아온 엄마를 대하는 선경의 태도가 매섭다. 성난 표정으로 날카로운 말을 쏟아내던 선경은 어떻게든 집에 머무르려는 엄마를 등떠밀어 문 밖으로 내쫒는다. 며칠후 집으로 찾아와 엄마가 많이 아프다는 말을 전하는 아저씨(엄마의 애인)의 말을 들은 선경은 슬픈지 않은 척 하며 냉정하게 아저씨를 쫒아낸다.


 고궁에서 일하던 선경은 헤어진 지 한 달 정도 지난 준호가 이쁘장한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선경은 지나치게 밝은 태도로 준호와 여자에게 아는체 하고 함께 사진까지 찍으며 과장된 명랑함을 보이는데 이는 헤어진 지 얼마 안된 연인에게 보일 수 있는 태도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슬프고 비참한 진짜 감정을 숨기기 위해 밝음을 연기하고 있다.


 모처럼 엄마를 찾아간 선경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가게 앞에 앉아 있던 경석(엄마와 아저씨의 아들)의 머리를 때린 일이다. 선경은 가게에 있던 다섯살난 경석이 차고 있던 시계를 자기꺼라며 빼앗으려 하다 아저씨와 엄마와 다툰다. 시계가 선경의 물건이 아니라고 하고 다투다가 넘어진 아저씨를 보살피는 엄마가 선경은 마뜩치 않다. 선경은 자신이 이 사람들 틈에서 배제되는 것처럼 느낀다.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선경은 외롭고 조금은 서러워 보인다.


 
 선경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찾아온 준호에게 선경은 매몰차고 독기어린 말을 내뱉는다. 선경의 날카로움을 꾹꾹 참아내다 화가 터진 준호가 "너 나한테 왜이러는데?" 라고 묻자 선경은 "너는 나한테 왜그래?" 라고 되묻는다. 집을 나가는 준호의 뒤에 선경이 뱉는 말은 "잘(들) 가세요. 그래. 잘 가, 개새끼(들)아" 이다. 그녀는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소외시키고 떠난다고 생각한다. 둘 사이의 파탄은 준호의 특정 행동 때문이라기보다는 선경이 타인과 관계맺는 방식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아이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타인과 관계맺는 법을 배운다. 부모에게서 습득한 관계맺는 방식은 그것이 상호긍정적이든 파괴적이든 아이의 성격이 되며 아이는 이 성격을 바탕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상대하게 된다. 선경은 엄마와의 관계에서 꼬인 감정과 마음을 준호를 상대로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그녀는 엄마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애정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그녀는 이미 성인이지만 마음은 자라지 못해 어린이에 불과하다. 선경이 엄마와 타인에게 쏟는 화와 짜증은 그녀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제발 자신을 사랑해 달라는 신호이다. 그 사실은 아저씨와 경석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명백해진다. 둘은 엄마와 친밀해 보이지만 자신은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기에 질투를 느껴 아저씨에게 불손하게 대하고 경석에게 심술을 부린다. 


 화내고 짜증부리면서도 선경은 계속 엄마곁을 맴도는 이유는 엄마의 병세가 점점 나빠져가기 때문이다. 낯빛이 누렇게 변해가고 머리가 빠져가는 엄마가 선경은 불안하다. 엄마가 없어지면 그토록 받고팠던 사랑을 자신은 영영 받을 수 없을 것이다.그녀가 문득 아저씨의 집에 쳐들어간 건 누구에게라도 화풀이하고픈 혼란스러운 마음에서 였을 것이다.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있던 아저씨에게 선경은 절대 대답하지 못하리라 생각한 곤란한 질문을 던진다. "아저씨, 우리 엄마 사랑하세요?" 수초의 정적과 몇 번의 망설임끝에 아저씨는 힘주어 대답한다. "그래, 사랑한다. 사랑한다. 진심이다, 선경아. 됐니?"


 선경은 엄마와 아저씨가 미적지근한 관계이길 바랐다. 아저씨가 엄마를 진짜로 좋아한 건 아니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선경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의 진심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선경은 다른 이를 진심으로 대하는게 두려웠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대했다가 사랑받지 못하는 일이 그녀로썬 무서웠다. 사랑받지 못해서 초라하고 부끄럽고 슬픈 자신의 본모습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이 두려웠다. 가면을 쓰는 편이 나았다. 지나친 밝음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하거나 냉정함과 신경질로 강한척 하는편이 그녀로썬 편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 가정을 잃을 위험을 감수했다. 아저씨의 진심은 선경이 스스로를 견딜 수 없게 한다.  

 엄마의 집에서 함께 밥을 먹는다. 엄마가 여행과 올 겨울의 눈 등 마지막을 연상케 하는 이야기를 하자 혼란스럽고 화가 난 선경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집을 나서려 한다. 나가려는 선경의 등뒤에 엄마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한다. 
 
 "선경아 엄마랑 어디 같이 좀 갈래?"
 "시간없어, 엄마"
 "그러지 말고 어디 같이 좀 가자..."
 "나 시간 없다니까!!!"
 "선경아..."

 그 대화는 엄마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경석과 단둘이 빈소를 지킨 장례가 끝나고 선경은 엄마가 두고간 여행가방 앞에 홀로 앉았다. 비밀번호를 몰라 열 수 없었던 가방을 어느 순간 딸깍 열어버린다. 가방안에는 선경의 어린시절 물건들이 빼곡히 들어 있다. 어린 선경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엄마와 찍은 사진, 색동옷을 입은 선경의 돌사진, 가지고 놀던 원숭이 인형, 아빠가 주었던 시계, 곱게 접힌 작은 옷들... 엄마는 선경의 어린시절 물건들을 이십년이 넘도록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선경은 울음을 터뜨린다. 그동안 울지 않았던 울음이 한번에 터져나와 그녀는 오랫동안 운다.


 선경은 스스로를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 말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마음 깊은 곳에서 엄마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경에게 가장 소중하고 절대적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는 한 그녀는 누구의 애정도 믿을 수 없다. 스스로를 사랑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구호인지를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이들은 알고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의 애정을 받지 못하는 한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다. 이 문제는 그녀 내부의 문제이며 스스로가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는 견고한 믿음이 깨지지 않는 한 타인의 진실한 애정도 그녀에겐 소용이 없다. 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로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 애정의 증거는 늘 도처에 있었다. 엄마가 건네는 말에,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 때때로 스스로의 내부에서 발견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밝은 것들에 있었다. 굳이 트렁크의 물건으로 증명하지 않았어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 깨달음이 너무 뒤늦게 찾아왔을 뿐이다.


 엄마의 사랑은 자신의 못난 행동과 어리석음을 모두 감싸안는 것임을 선경은 안다. 실컷 울고난후에 선경은 이제 엄마없이 세상을 살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이전보다 한결 덜 외롭고 더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누군가에게 받은 진실한 애정은 결코 사라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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