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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Dec 18. 2018

그 모든 고통에서 불구하고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고통은 개인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수감자들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 그곳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들이 들려주는 증언을 통해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뿐이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독일의 점령지역에서 대규모 수용소를 여러 개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에선 손쉽고 신속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가스실과 죽은 시체를 불태운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화장터가 다수 발견되었다. 전쟁기간동안 나치의 인종 말살 정책에 의해 수백만의 유대인과 유색인종이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수감자들은 생존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분량의 음식을 배급받았고 새벽부터 밤까지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들은 감시병과 카포의 폭력과 욕설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고 좁은 잠자리에서 추위와 벼룩에 시달리며 짧은 잠을 잤다. 잔혹한 생존조건에서 수감자들은 허기와 질병에 시달렸다. 빅터 프랭클은 3년의 혹독한 수용소 생활을 견디고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다. 수형생활동안 정신과 의사로서 정신의학적 관점으로 자신과 타인의 생활과 심리를 면밀히 관찰했고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얻었다. 이 통찰은 후에 로고테라피로 발전했고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삶이 만족스러운 이들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불행을 겪은 후에야 인생을 되돌아보며 삶의 의미를 묻는다. 처음에는 불행에서 발생하는 고통 때문에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여력이 없다. 시간이 흘러 불행에 익숙해졌을 때(인간은 불행에조차 적응한다.) 당사자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왜 하필 나야?' 이 정도로 근본적이고 괴롭고 대답을 찾기 힘든 질문은 드물다. 평탄한 삶을 살아갈 땐 전혀 해보지 않았던 질문을 불행을 겪은 후에야 묻게 된다. ‘유별나게 나쁜 짓을 한 적도 없고 평범하게 살아왔을 뿐인데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라는 물음이 떠나질 않는다. 고통 속에 좀 더 오래 있다 보면 인정하기 싫음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사실이 있다. 때때로 우리에겐 특별한 인과관계와 이유가 없는 불행이 찾아온다. 이유가 없다는 삶의 부조리함이 당사자를 괴롭게 한다. 불행을 겪기 전에는 행복하고 평온한 생활만이 내 삶이며 고통은 외부에 있는 타인의 것이었다. 불행 속에 오래 머물러 있다 보면 통곡과 한탄과 괴로움이 원래부터 삶의 일부였단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인생의 의미에는 행복과 평온한 삶뿐만 아니라 빈곤, 궁핍, 그리고 죽음마저 포함된다는 걸 알게 된다.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한다.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하는 삶, 예술과 자연에서 충족감을 얻는 삶, 시련에서 의미를 찾는 삶이다. 불행과 시련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은 우리가 속한 문화권에서 다소 생경하고 의아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여태껏 불행은 어떻게든 피하고 외면해야 할 치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화는 행복을 삶을 기본조건으로 규정하고 행복의 조건을 일정한 틀로 정해놓는다. 우리는 행복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느낀다. 행복하다고 여겨지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얻어야 하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과 인간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사회가 요구하는 행복의 기준을 충족시키려면 치열한 경쟁을 통과해야하며 이 문화는 불행을 실패로 간주하기에 불행을 겪는 사람은 행복하지 못한 스스로의 인생을 실패로 규정하고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게 된다. 직접 겪은 일만이 우리에게 깊고 커다란 깨달음을 줄 수 있다. 불행과 절망 속에 오래 있어 본 이가 깨닫는 것은 사람은 불행할 수 있고 불행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평온한 삶을 살 땐 ‘절대 불행해선 안 돼’라고 생각하지만 행복과 기쁨이 삶인 것처럼 불행과 슬픔도 삶의 일부이다. 삶은 잔혹하며 때때로 우리를 어두운 구렁텅이로 등떠민다. 처음에는 삶에서 떠밀려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구렁텅이조차 삶의 일부였단 걸 알게 된다. 



물론 고통과 불행은 피할 수 있다면 당연히 피하고,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시련을 삶의 일부로 용기 있게 받아들이는 자와 불행한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판이한 삶의 궤적을 그리게 된다. 수용소의 가혹한 조건에서 살다보면 일상을 영위하길 포기하는 자가 생긴다. 그는 일어나 일하러 나가기를 거부하고 침상위에서 더 이상 움직이길 거부하며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그저 누워있으려고만 한다. 그는 고통으로 가득찬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이 수감자의 태도는 고통만 있는 삶이라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과연 이 삶은 괴로움을 견디고서라도 지켜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시련에는 가치가 있을까? 절망에 빠진 이들은 이 질문에 어떻게든 답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고통과 불행은 쓸모없고 의미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불행은 당사자에게서 일상을 박탈하고 고통을 견뎌야 하는 상황에 몰아넣는다. 프랭클 박사는 시련을 감내함으로써 얻는 가치를 이야기 한다. 시련에는 인간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시련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이를 묵묵히 견뎌내기로 결심한 사람은 평범한 삶에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커다란 내적 성취를 이룰 기회를 갖는다. 온 힘을 다해 불행에 맞서 버티는 동안 정신에는 근육이 붙고 내부 세계는 한없이 깊어진다. 거리를 두고 멀리서 볼 때 건물의 전체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불행은 이전의 삶과 당사자를 분리시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간격을 제공한다. 열심히 추구해왔던 목표가 실상은 허위의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을 수도 있고 오랜 시간 동안 상처를 안고 살아왔음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이제껏 무던하게 흘러왔던 삶에 사실은 눈치 채지 못했던 누군가의 애정과 따뜻한 손길이 있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생에서 의미를 찾는데 실패한 수감자들의 전형적인 대답은 이런 것이다.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프랭클은 여기서 상황을 보는 관점을 획기적으로 전환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 전환은 로고테라피의 핵심 주제이며, 삶의 주도권을 갖기 위해 삶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자의 관점은 인간을 외부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수동적인 존재로 남게 하지만 후자의 관점은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게 하고 주어진 조건 하에서 인간의 영향력을 극대화 시킨다. 전자가 삶의 의미를 알 수 없어 주저앉는다면 후자는 적극적으로 버티고 살아냄으로써 의미를 발견해 나간다.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 절망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이런 수요에 힘입어 삶의 의미를 설파하는 강의와 책이 범람한다. 하지만 타인이 제시한 해답은 나의 답이 될 수 없다. 모두의 인생은 저마다의 개별성을 지니며 각자 다른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환경에서 각자의 답을 찾아야 하며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에 대해 모든 이에게 적용될 수 있는 확정된 답변은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관념적인 언어로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질문은 삶을 살아냄으로써만 답할 수 있다. 고통을 외면하거나 환상으로 도피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고된 삶을 정직한 태도로 살아냄으로써만 답할 수 있는 것이다. 



치과 치료에서 느낀 통증을 불행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불행의 특징은 오랜 시간 계속된다는 점이며 그것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고통스럽더라도 살아냄으로써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변하려는 사람에겐 숙제가 남는다. 완수해야 할 시련은 매일 숙제처럼 주어지며 반복되는 고통은 기력을 소진시키고 생에 대한 의지를 약하게 만든다. ‘살아가겠다!’는 다짐은 인생의 거듭된 공격에 언제든지 약해질 수 있다. 의지를 붇돋우고 시련을 견딜힘을 내기 위해서는 붙잡고 버틸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키워낼 필요가 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는 주인공 앤디가 교도소를 탈옥하는 장면이 있다. 앤디는 포스터로 감춰놓은 기다란 구멍을 지나 축구장 4개 길이의 악취 나는 하수관을 기어가 그토록 원했던 자유로운 공간에 도달한다. 앤디가 탈옥한 직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오물에 찌든 죄수복을 벗어버리고 자유를 만끽하는 장면은 관객의 시선을 빼앗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정말 주목해야 부분은 앤디가 탈출을 위해 19년 동안 작은 조각망치로 굴을 파왔다는 사실이다. 앤디의 희망은 현실의 삶 속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각고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 이 사실은 희망의 형태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미래에 대한 단순한 낙관을 희망이라 할 순 없다. 그러한 막연한 기대는 오히려 당사자가 현실의 어려움과 눈앞의 시련을 외면하게 함으로써 삶을 제대로 살 수 없게 만든다. 희망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의 냉정한 직시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한 순간의 다짐이 아니라 매일의 실천으로 조금씩 모습을 갖추어가는 것이라야 한다. 



이 책은 삶의 의미에 대한 담론을 다루지만 프랭클 박사의 진짜 의도는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을 설득하려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힘들어도 죽지 말고 어떻게든 살아보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수용소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생명을 이어가게 해주었던 깊은 통찰이 담긴 이야기라면 일상에서 고통 받는 수많은 이들에게도 분명 도움이 될 꺼라 생각했던 것이다. 프랭클 박사의 책을 읽고 죽음을 유보하고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삶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사람들이 자살충동을 느끼기 때문에 생겨난다. 살다보면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순간이 찾아온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에 삶을 포기하려는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다. 저서에서 프랭클 박사는 내내 의연한 모습을 보이지만 사실 그도 힘들 땐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을 것이다. 박사는 스스로를 설득하는데 성공했기에 책을 읽은 이들을 감화시킬 수 있었다. 이 책에 힘이 있다면 박사가 죽고 싶어 하는 자신을 수없이 설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 믿는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불행을 겪어낼 때 고립되어 있지만 그 고독의 시간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더 깊게 이해하면서 타인과 연결될 수 있다. 언젠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을 견뎌내고 있을 이름 모를 사람들을 떠올린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많은 아픈 이들에게 어떻게든 견뎌내서 밝은 곳으로 가보자는 말을 건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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