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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Dec 16. 2018

나도 나비가 될 수 있을까요? (2편)

<꽃들에게 희망을>

노랑애벌레가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경쟁의 고통을 감내하며 기둥을 오르는 일만이 유일한 해답이 아니란 걸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고치속에 들어가려는 늙은 애벌레에게 자신들이 '나비'가 될 수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는다. 고치를 만든다고 해도 나비가 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는 고치를 만드는 모험을 감행한다.


어떤 애벌레들은 높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이 경쟁이 커다란 희생를 감내할만큼 가치있는 일이 아니란 걸 직감한다. 그들은 멈춰선 채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내부의 어떤 반짝임에서 더 나은 삶에 대한 암시를 얻는다. 호랑 애벌레가 기둥에서 내려오면서 봤던 것처럼 우리 내부에는 한 마리의 나비가 조용하게 날갯짓을 하고 있다. 나비의 나폴거림은 미세한 떨림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우리가 달리 무얼 할 수 있겠어라고 체념하는 애벌레에게 호랑애벌레는 외친다. 우리는 날 수 있어우리는 나비가 될 수 있어.’ 애벌레로 사는 길밖에 없다고 오랬동안 생각해온 이들에게 자신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든 소식이다. 많은 경우 존재가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스스로의 규정이 삶의 행로를 결정짓는다. 나비가 되려는 이는 우리가 무력한 애벌레에 불과하다는, 무기력을 조장하고 가능성의 싹을 잘라버리는 말에 반박해야 한다.나비가 되기 위한 첫단계는 자신이 나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꼭대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허탈감에 빠진 호랑애벌레에게 기적처럼 노랑 나비가 나타난다. 노랑 나비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나비'라는 다른 가능성을 설핏 보여준다. 나비가 도움의 손을 뻗었을 때 그는 나비의 손을 잡지 않는다. 자신의 힘으로 기둥을 벗어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나비가 되기 위한 관문을 호랑애벌레는 스스로의 힘으로 통과해야 했다. 애벌레 기둥의 무상함을 깨닫고, 힘겹게 올라간 애벌레 기둥에서 내려오고, 고치에 들어가 긴 시간을 견디는 건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고치를 다른 애벌레가 대신 만들어주지 못하듯이 , 타인은 나의 나비를 만들어 줄 수 없다. 나비가 된다는 건 자기 내부로 난 길로 긴 여행을 시작한다는 걸 뜻하며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다.


'그애가 옳을지도 몰라 나한테 무슨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나비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나머지 그런 환상을 꾸며낸 게 아닐까?'


나비가 되길 바라는 애벌레는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이 별 볼일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잠식한다. 고치를 만들고 어둠을 견디는 위험을 감수했음에도 나비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치 안으로 들어가는 모험을 감내하는 일 없이 내부의 나비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어떤 이들은 나비가 되길 원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신 안에 나비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게 무서워 오랫동안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한다. 평생 애벌레로 살기를 선택하면 적어도 자신에게 실망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 모험을 하는 이는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나비가 되기 전에는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비가 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을 받은 채 고치 속으로 들어가는 애벌레는 없다. 실패의 가능성이 없는 도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고치를 만드는 애벌레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수없는 시행착오는 필연적인 과정이란 걸 받아들여야만 한다. 실패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은 끝없이 망설이게 한다. 절대로 실패할 수 없기에 작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나비는 긴 시간의 방황과 거듭되는 시도를 통해 키워내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의심과 불안을 이겨내는 수단은 역설적으로 나비가 되기 위한 노력이다. 나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매일의 노력으로 나비에 다가가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얻을 수 밖에 없다. 나비가 되고 싶다는 바람만으로는 나비가 될 수 없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나비가 되려는 애벌레는 나비가 되기 위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나비를 꿈꾸는 이의 삶은 애벌레와 나비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다. 현실 세계는 나비를 지향하더라도 얼마간은 애벌레 기둥을 오르지 않을 수 없다. 먹이를 구해야 하고, 살 곳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애벌레로서 고통스럽게 기둥을 올라본 경험은 소중하다. 애벌레 기둥은 애벌레에게 현실감각을 일깨워주고, 사는 일의 어려움을 알게 해주며 다른 애벌레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마음의 공간을 넓혀준다. 애벌레 기둥을 모르는 이는 나비의 삶을 살더라도 다른 애벌레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고통은 애벌레를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고통스럽기에 자신을 되돌아보고 보다 나은 삶을 모색한다. 고통 속에 기어본 애벌레만이 날아다니는 행위의 소중함을 안다. 다만 애벌레로서의 무미건조한 삶만이 지속된다면 그의 영혼은 고된 생활 속에서 점차 지쳐갈 것이다.


인생을 애벌레/나비의 이분법적 잣대로 바라보면 나비되기를 지나치게 버거운 도전으로 인식하게 된다.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다. 나비가 된다는 건 한 순간의 결심이라기보다 긴 시간의 과정에 가깝다. 경마와 복권보다는 농사에 가까운 일이다. 애초부터 완성된 나비를 품고 있는 애벌레는 없다. 매일의 삶 속에서, 나비되기에 시간과 마음을 쏟을 때 나비는 그 몸피를 키우고 또렷한 형상을 갖춰간다.


나비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이 의미와 즐거움을 준다는 건 내부에 나비의 씨앗이 있다는 증거이다. 노력의 과정이 때때로 괴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 괴로움은 애벌레기둥을 오르는 행위와는 달리 그를 소진시키지 않고 삶을 의미있게 한다. '나비되기'의 성취는 애벌레가 최종적으로 나비가 되느냐 아니냐로 판가름나는 게 아니다. 최종목표인 나비만큼이나 소중한 건 나비가 되기 위해 방황하며 보낸 시간 그 자체이다.


나비가 되기까지 애벌레는 긴 시간을 기다린다. 기어다니는 일이 버겁고 생존에의 투쟁이 고통스러워도 그는 살아낸다. 고치의 형태로 나뭇가지에 매달려 차디찬 어둠의 시간을 견딘다. 우리가 목격하는 건 한 마리 나비의 그림같은 모습이지만, 나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랫동안 생명을 간수해오며,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왔다. 세상의 모든 나비들은 그런 시간을 건너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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