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따뜻한 날, 동네 뒷산에 오르면 조용한 날갯짓으로 풀밭을 날아다니는 나비와 이따금씩 마주친다. 잠시 바라보다 이내 지나쳐버리고 말지만 생각해보면 나비의 지난 삶은 고됐을지도 모른다. 조그마한 몸으로 땅 위를 기어다니고, 고치로 자신을 감싼 채 긴 시간을 보낸 후에야 애벌레는 비로소 나비가 된다. 성취를 이루고 자신이 바라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내는 사람은 없다. 학자는 밤늦도록 책과 씨름하고 운동선수는 부단히 몸을 단련한다.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 도달하기 위해 분발하고 고뇌한다.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우리는 보다 나은 삶을 찾기 위해 애쓰는 애벌레를 보게 된다. 대게의 훌륭한 이야기들이 그런 것처럼 호랑애벌레도 정든 나무에서 내려와 여행을 떠난다. 사건을 겪고 누군가를 만나며 삶의 방향을 모색한다. 독자가 자신도 모르게 애벌레의 모습에 마음을 투영하는 건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 삶의 본질과 정확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계 대부분의 애벌레들은 높은 하늘 위,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그곳에 이곳보다 나은 멋진 삶이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으로 기둥을 쌓아 그곳에 도달하려 한다. 구름을 뚫고 치솟은 애벌레 기둥은 까마득히 높다. 저마다의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를 짓밟고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려 한다. 힘이 세고 무자비한 벌레들만이 상층부에 오를 수 있다. 아래쪽에 있는 대부분의 애벌레는 위쪽 벌레들의 발판이 된다. 호랑애벌레가 기둥을 오르기로 마음먹은 건 대부분의 애벌레들이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많은 애벌레가 오르려고 애쓰는 그곳은 좋은 곳이 틀림없다고 결론내린 것이다. 하지만 다른 애벌레들이 기둥을 오르는 이유 또한 호랑애벌레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벌레들이 헐레벌떡 기둥으로 기어가는 모습은 호랑애벌레의 마음을 조급하게 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기둥을 올라야 된다는 생각에 쫓겨 오르는 일의 의미를 생각해보지 못한 채 그곳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애벌레기둥을 오르는 건 고된 일이었다. 다른 애벌레를 밟고 올라서야 했고 힘들게 올라간 자리를 지키기 위해 기를 쓰고 버텨야 했다.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연민과 애정은 올라가는 일에 방해가 되는 억눌러야 할 감정이었다. 주변의 모든 벌레는 목표로 가는 길을 막는 장애물이다. 모든 애벌레가 모든 애벌레와 경쟁했다. 서로 뒤엉켜 있었지만 이들 모두가 혼자였다. 꼭대기에 뭔가 멋진 것이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애벌레들의 유일한 희망이다. '꼭대기에는 뭐가 있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라는 질문이 호랑애벌레의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답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때 호랑애벌레는 노랑애벌레를 만난다. 노랑애벌레와의 관계는 호랑애벌레의 마음에 타인이 들어설 공간을 만든다. 그는 위에 있는 게 아무리 멋진 것이라도 다른 애벌레들을 짓밟고 올라가 차지할 만큼의 가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둘은 기둥을 내려가기로 마음먹는다.
지난 삶을 위로 올라가려고 버둥대는 애벌레처럼 살아왔다. 대학에 간 이유는 다른 학생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취준생들이 그렇듯 남들에게 번듯하게 보일수 있는 스펙을 쌓거나 공무원이 되기 위한 공부를 했다. 적성과 맞는 일을 잠깐씩 궁리해보기도 했지만 그리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서둘러야 하는 내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내게 맞는 진로를 찾는 건 상당한 정신적 에너지와 인내를 요하는 골치 아픈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면 편했다. 하루 종일 열람실에 앉아있어야 했지만 준비해야 할 것들이 선생님이 내준 숙제처럼 분명했다. 하지만 난 허약하고 둔한 애벌레였다. 이를 악물고 매진하면 구름위로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언제나 기둥의 중간정도에서 지체된 채 나아가지 못했다. 애벌레기둥에서 난 평균에 못미치는 열등생이었다.
" 그래도 어쩐지, 노랑 애벌레는 무턱대고 행동하기보다는 미심쩍은 채로 그냥 기다리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들을 흉내내며 살아온 내겐 달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멈춰설 수 있을 정도의 주체성이 없었다. 어쩌면 내게 필요했던 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용기였는지도 모르겠다. 러시아워의 지하철역에서 바삐 걷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걸으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진다. 왠지 그들의 속도에 맞추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다. 남들이 바쁘게 어디론가 향할 때 가만히 멈춰 서 있으면 왠지 뒤쳐지는 것만 같다. 다급히 이동하는 군중틈에 홀로 멈춰선 채 어디로 가야 할지를 근본에서부터 따져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주체적인 의지로 멈춰서는 건 두려움에 쫓겨 뛰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의사결정일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멈춰선 듯 보이지만 이미 옳은 방향으로 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나는 잘못된 질문을 품고 살아온 게 아닐까? '꼭대기에 어떻게 하면 도달할 수 있지?' 는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지?'
기둥을 내려온 두 애벌레는 한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이내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서로 원하는 바가 달랐기 때문이다. 꼭대기에 더 나은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에 호랑애벌레는 다시 한번 기둥을 오르기로 한다. 아래에서 푹 쉬며 강해진 그는 무자비하게 다른 애벌레들을 짓밟으며 빠른 속도로 위로 향한다. 갖은 고통을 감수하며 꼭대기에 도착한 그는 꼭대기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리고 꼭대기에 오른 애벌레들이 그 사실을 암묵적으로 은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상은 애벌레 기둥에 오르는 가혹한 행렬에 동참하기를, 은근하게 부추기고 강요한다. 꼭대기에 가까워지는 만큼 행복해질 거라고 사람들을 현혹한다. 정점에 선 애벌레들은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부와 권력의 특권을 누린다. 기둥 아래쪽에 있는 대부분의 애벌레는 꼭대기 애벌레들을 선망하며 그들처럼 높은 위치에 오르기를 갈망한다. 애벌레들은 발아래 있는 이들에게서 우월감을, 높은 곳에 있는 그들에게 열등감을 느낀다.이곳은 우월감과 열등감의 세계, 기둥에서 애벌레가 차지한 높이만이 그의 가치를 규정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