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파서 2년 정도 아무것도 못 하다가 책상 앞에 한 시간은 앉아있을 정도로 몸상태가 나아졌을 때 다시 취업준비를 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친구들 중에는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 취업하거나 소방, 경찰공무원이 되는 등 번듯한 직업을 가진 애들도 있었다. 나는 소방공무원이 되려고 했다.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된다는 게 일차적인 이유였다. 일반행정직보단 경쟁률이 낮으니 시험에 붙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할 거라는 얕은 계산도 있었다.
공무원 시험은 도서관을 두 달 남짓 다니다 그만두었다. 속이 점점 안 좋아지는 증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수험서를 읽다 보면 명치가 갑갑해지고 속이 더부룩해지고 트림이 나왔다. 허리 아픈 것은 중간중간에 스트레칭을 하며 어떻게든 버텨보는데, 속이 안 좋아지니 집중해서 책을 보는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후 몸상태가 지속적으로 나빠져 3년 정도가 지났을 때는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마저 버거울 지경이 됐다. 소화기능이 떨어져 하루에 감자 두어 개 정도를 겨우 먹었고, 이마저도 소화를 못 시켜 체할 때도 있었다. 체중이 40킬로 가까이 떨어지기도 했다.
운 좋게 몸에 맞는 치료법을 찾아 척추며 위장기능이 어느 정도 나아졌을 때, 어떤 일을 할까 고민하다 다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게 됐다. 투병기간 동안 책 읽기와 글쓰기에 관심이 생겼고, 출판사 편집자나 프리랜서 기고가 등의 직업을 떠올려보기도 했지만 출판사에 들어갈 자신이 없었고, 프리랜서로서 돈에 쪼들리며 글을 써갈 걸 떠올리면 앞날이 암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시간제 공무원이든 군무원이든 일단 붙어서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고 남는 시간에 글을 써보겠다고 생각했다.
독서실이나 도서관은 책상과 의자가 불편하고 집중도 잘 안 돼서 집에서 공부했다. 고개를 숙이면 목이 아파서 자세를 똑바로 유지하려고 종이상자 위에 독서대를 올려두고 책을 보았다. 과목별로 봐야 할 내용이 천 페이지가 넘었는데, 책 읽는 게 느려서 진도가 잘 나가질 않았고 이해가 안 되는 내용도 많았다. 시험 치기 전에 책을 10번은 봐야 한다는데 내 속도로는 5번도 쉽지 않을 듯했다. 군무원 9급은 세 과목밖에 없는데도 이렇게 시간이 빠듯하게 느껴지는데 과목이 일곱 개인 7급 시험은 도대체 어떻게들 공부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일주일에 하루를 쉬었는데 그나마 다 쉬는 게 아까워서 점심때까지는 책을 붙잡고 있었다.
군무원 시험을 볼 생각을 한 건 허리나 위장기관이 건강할 때와 비교해 60%는 회복됐다고 느껴서였다. 공부를 시작하고 다시 몸 여기저기가 아파왔다. 허리가 쑤시고 목과 등이 딱딱하게 굳어서 수시로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고 등을 두드리고 승모근을 주물렀다. 뱃속이 더부룩하거나 체하는 일도 잦아 밥 먹을 때 한 숟갈에 백번 정도 씹었다. 이따금 몸을 풀지 않으면 않으면 공부를 지속하는 게 어려워 일주일에 한 번씩 왕복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지압원에서 지압을 받았다. 원장님은 내 몸이 냉동고등어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다고 했다. 당시에 나는 내 몸이 고된 수험생활을 이겨내기에 너무 약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늘 공부가 잘 되고 있지 않다, 진도 나가는 게 느리다, 성과가 미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온갖 신체증상을 견디며 공부를 이어가는 게 힘들었다. 난 삶을 사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삶을 견디고 있는 것인가. 안 그래도 자존감이 낮은데 집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고 있자니 스스로가 더욱 못난 사람으로 느껴졌다. 내부에서 온갖 비교의식과 열등감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회사에서 몇 년째 일하는 친구들도 있고 결혼한 애도 있는데 나는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집에서 공시준비를 한다. 직장 한번 들어가 본 적이 없다. 난 못생겼다. 거울을 보면 기름진 머리, 후줄근한 차림의 삐쩍 마른 삼십 대 중반 아저씨가 있었다. 이때 나는 종일 숨 쉬고 밥 먹듯 자책과 자기 비하를 했다. 세계 자기 비하 대회가 있었다면 나는 매년 유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됐을 것이다.
시험을 한 달 정도 남겨두고서 배에 붉고 큼직한 반점이 생겼다. 근질근질해서 거슬렸는데 팔뚝에, 목에, 허벅지에... 날이 갈수록 개수가 늘었다. 동네병원 의사는 최근에 풀밭에 간 적이 있냐고 물었지만 집에서 책만 보느라 강아지풀 한 포기 만져본 일이 없었다.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가스가 차서 속이 불편해 새벽에 깨고, 아침에 일어나면 눈이 퀭했다.
10개월 정도 공부하고 시험을 쳤는데 보기 좋게 떨어졌다. 합격점과 20점 이상 차이가 나는, 공부했다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의 성적이었다. 군무원 카페에는 수험생들이 국어과목에 지엽적이고 시험범위에서 벗어난 문제가 많았다고 주최 측에 화를 냈지만, 난 사실 국어과목뿐 아니라 행정학과 행정법 성적도 엉망이었다.
시험결과를 확인하고 나서 우울감, 무력감, 허리와 목의 통증 등이 해일처럼 나를 덮쳤다. 억울함인지, 절망감인지, 울분인지, 허탈함인지, 체념인지 모를 시커멓고 끈적끈적한 감정이 뱃속에서 목구멍으로 입으로 귀와 코로 꾸역꾸역 밀려 나왔다. 종일 명치 쪽에서 뜨겁고 답답한 감정이 끓어올라 스스로를 추스를 수가 없었다. 내부에서 감정이 날뛰고 뒤엉키고 들끓어서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우울증 앓는 사람들 얘기를 들을 때마다 힘들겠구나 피상적으로만 생각했지 그들이 겪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헤아려보지는 않았다. 스스로를 어쩔 수 없다는 게 어떤 건지 이때 처음으로 느껴본 것 같다.
넷플렉스로 재미없는 미국드라마를 꾸역꾸역 보다 괴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이부자리로 기어간다. 한 팔, 한 무릎 기어가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이불에 머리를 처박은 채 머리칼을 부여잡고 끙끙댄다. 끄윽끄윽 혼자 신음한다. 유튜브를 보다, 진격의 거인을 두세 시간 보다... 아... 어쩌지. 나 이제 어떻게 살지. 언제 붙게 될지 기약도 없는, 영영 못 붙을지도 모를 이 공부를 또 해야 하나, 지독하게 재미없는 수험서만 읽으며 또 몇 년을 보내야 하나. 취업성공패키지라도 해볼까, 목공일이라도 배워볼까. 책상 앞에 앉아 아무리 고민해 봐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 안 온다.
지역의 심리상담센터에서 무료로 상담을 받았다. 나처럼 괴로움과 우울에 빠진 청년들이 하도 많다 보니 지자체에서 상담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 듯했다. 나보다 몇 살 어려 보이는 상담사에게 투병생활한 것, 시험에 떨어진 것 등을 얘기했다. 그는 그동안 충분히 열심히 해오셨고 잘해오셨다. 누구라도 힘들 상황이었는데 정말 잘 버텨오셨다'라고 얘기해 주었다. 그와 상담한 후 마음의 혼란이 누그러든 건 상담사가 해준 말이 내게 필요한 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간단하고 뻔하고 시험에 떨어진 친구가 있으면 나라도 했을법한 말인데 신기하게도 스스로는 이 말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