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에 맞추어 적당한 곳을 지원한 뒤 한동안 집에서 텔레비전과 컴퓨터 게임으로 시간을 보냈다. 만날 친구도 별로 없었다. 애매하게 노력해서 형편없는 성적을 받은 후에 찾아온 휴식은 신나지도 개운하지도 않았다. 오후 무렵 방안에 떠다니는 먼지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채로 무료하고 헛헛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친구들 중 세 명이 재수를 했다. 매일 점심을 육개장 컵라면으로 때우며 1년간 도서관에 붙어있던 한 친구는 1년 후에 한국에서 최고 수준의 대학에 합격했다. 다른 두 친구도 첫해 때보다 훨씬 오른 성적으로 목표로 하던 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애초부터 재수를 할 생각이 없었다. 골치 아프고 답답한 공부를 1년이나 더 한다고 상상하면 거부감이 들었다. 고된 수험생활을 인내하며 1년을 더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난 그냥 당장에 공부 안 하고 편하게 지내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재수를 하지 않은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재수를 한다 해도 성적을 올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몇 년간 이런저런 노력을 해봤지만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1년 더 공부한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고 더 나은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한번 더 도전하는 대신 그저 생각 없이, 목표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쪽을 택했다.
은행원을 준비하다 그만두거나, 공무원 시험에 떨어졌을 때 몸이 심하게 아팠다. 그렇다면 왜 최초의 실패인 수능시험 때는 아프지 않았을까? 은행취업이나 공무원임용은 잘 안 됐을 경우 기약 없이 백수로 남아야 하는 반면, 수능시험 때는 애매한 성적을 받더라도 일단 대학은 갈 수 있다. 만족스러운 간판의 대학이 아닐지라도 일단 '대학생'이라는 사회적 신분은 얻는다. 또 은행원, 공무원 시험은 내심 합격이 어려울 것 같다고 느끼면서도 실낱같은 기대를 가지고 노력은 쏟아부은 반면 수능시험은 고3 중반이 지난 시점부터 이미 틀렸다고 생각해 체념한 채로 시험을 치렀다.
나는 지나친 입시경쟁이 수많은 아이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견해에 동의해 왔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하나하나의 생명으로 인정받기보다 내신등급으로 줄 세워지는 경험을 하고, 밤늦게까지 학원에 붙잡혀 있으면서 생명력과 삶의 의욕을 잃고 무기력해져 간다는 것이다. 성인이 된 후의 나는 고등학교시절의 공부를 내키지 않는 것을 억지로 했던 경험, 자신과 친구들을 성적이란 잣대로 평가하게 하는 비인간적인 경험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입시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지, 내 체험에서 만들어낸 나만의 의미는 아니었다.
내가 중고등학교 6년을 공부하며 스스로에 대해 얻은 결론은 '해봤자 안된다'였다. 나는 인생에서 잘해보고 싶어서 노력한 첫 번째 일에서 이래저래 노력을 쏟아보았지만 안 되는 경험을 했다. 수능 실패 후에는 지긋지긋한 공부에서 벗어나 편해지고 싶어서, 결정적으로는 성적을 올릴 자신이 없어서 재수를 하지 않는다. 이후에는 맘에도 없는 학과를 다니며 성적은 죄다 D, F를 받는 물대학생 생활을 하게 된다.
나에게 수능은 단순히 보잘것없는 점수를 받고 성적 맞춰 대학에 들어간 것을 넘어 내가 스스로를 어느 정도의 사람으로 여길지를 결정하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재수포기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고민하고 목표에 도전하기보다 '해봤자 안된다'라고 믿고 스스로나 인생에 대한 고민 없이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기를 선택한 경험이었다. 나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로 수능 때 받은 255점이란 점수로 스스로를 규정하게 되었다. 이 자기규정은 이후의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난 이후의 삶에서 취업준비를 하든 글을 쓰든 취미생활을 하든 이 255점이란 자기규정을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스스로를 255점으로 규정하고 있는 한 난 죽어도 이 틀을 넘어선 성취는 이룰 수 없었다. 이 틀은 내가 주변으로 그어놓은 작은 동심원이었다. 내 사고와 행동과 능력과 성과는 이 동심원을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이 틀을 벗어난 나를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내가 살아오며 경험한 건 이 동심원 안의 세계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동심원 안에서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나를 끊임없이 자책한다. 이 바보, 왜 아무리 해도 이것밖에 안되니, 이 머저리 같은 녀석아, 왜 이것밖에 못하냐.
누군가는 255점으로 살아가면 되잖아, 255점이라고 죽는 것도 아니고 살아갈 수 있잖아. 물을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주변의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 숨 쉬는 것, 먹는 것,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기적에 감사하며 살아가면 되지 않느냐고. 나도 그러려고 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게 안된다. 문제는 내 안에 평범함을 넘어 빛나고 싶은, 무언가를 이루고픈, 인정받고픈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내게는 탁월한 성취를 이루고픈 갈망이 있다.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넘어 잘 살고 싶다. 내 노력과 재능을 쏟아부어 목표로 삼은 것을 이루고 싶다. 스스로가 뭔가 이룰 수 있는 사람이란 걸 확인해보고 싶다. 그저 살아가는 것,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가는 걸로는 만족이 안된다.
나는 빛나는 존재가 되고 싶다. 그러니까 그렇게 노력을 해 왔을 것이다. 동시에 나는 스스로를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성취를 이루고 싶다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기에 무언가를 성취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현실은 계속 불만족스러운 상태로 전전긍긍하며 살게 된다. 현실에선 늘 근근이 연명하는데 뭔가를 성취하고픈 욕구는 있으니 현실과 욕망의 커다란 간극에서 늘 결핍감을 느끼며 살게 된다. 스스로가 255점 짜리라는 믿음을 바꿔내지 않고는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루기가 어려울 것이다. 의미 있는 성취를 해내기 전까지 나는 계속 연명하는 상태로 살게 될 것이다.
나는 재수를 안 한다고 마음먹을 때 이제 지겨운 공부는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단순히 재수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누구나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인생의 과제에서 도망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맞서지 않고 회피해 버린 과제는 그날부터 지금까지 나를 따라다녔다.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나는 그 과제와 다시 한번 맞서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