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3학년이 끝나고, 휴학해서 영어공부를 하는데 등허리가 심하게 아파왔다. 그래도 은행원을 준비할 때는 간신히 버텨가며 공부는 할 수 있는 정도로 아팠는데 이제는 통증이 너무 심해서 책상에 앉을 수가 없었다. 난 당시에 이것을 몸의 문제로 여겨 병원을 찾아다니고, 민간요법을 검색했다. 이런저런 방법을 써봤지만 3개월, 1년이 지나도 몸의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난 왜 몸이 아팠을까? 이 아픔은 내게 무엇을 말하는 걸까? 은행원 되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듯 보였지만 속으로는 크게 절망했던 게 아닐까? 나는 힘든 상황에서도 무진 애를 써왔다. 성과는 지지부진했지만 그것을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을 쏟았는지 나는 안다. 두꺼운 증권투자상담사 책을 몇 번씩 읽으며 두 번의 시험 끝에 겨우 자격증 하나를 땄다. 방학 때는 놀러 가지도 않고 도서관에 붙어있었다. 매일 도서관에 드나들면서 꾸역꾸역 자격증 영어 공부를 했는데 그런 노력이 다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아... 내가 그동안 쏟은 노력이 의미가 없었구나. 노력해 온 게 다 물거품이 됐어. 내가 뭐 잘난 게 있나. 잘하는 게 있나. 나는 스스로가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고, 취업이라도 해서 뭔가 할 수 있단 걸, 내가 그렇게까지 덜떨어진 존재는 아니란 걸 증명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됐구나.
나는 나의 좌절감, 절망감, 허망함 같은 감정들을 보려 하지 않고, 못 보고, 실패했음에도 대수롭지 않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난 평생 불편한 감정을 외면하고 못 본 척하며 살아왔으니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다. 그 감정들이 내 몸을 통해 표현된 게 아닐까. 너 지금 굉장히 좌절감을 느끼고, 절망하고 있다고 몸이 신체증상을 통해 신호를 보낸 게 아닐까.
왜 여러 부위 중에서 허리와 목이 아팠을까. 또 책상에 앉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아팠을까. 허리와 목 통증은 서 있을 때는 그나마 덜했다. 의자에 앉으면 1분도 안 돼서 목과 등이 숨 쉬는 게 불편할 정도로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그것이 척추관절에 변형이 생겨서 일어나는 통증과 불편함이니 척추관절을 치료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통증은 나에게 구체적인 뭔가를 말하고 있지 않았을까?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증상이 심하게 나타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건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하기를 거부하는 마음이 나타난 게 아닐까? 뭐든 열심히 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달리 취업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드러난 게 아닐까? 왜냐하면 노력해 봤자 안될 거니까.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해 왔으므로.
취업준비를 한다는 건 내가 처한 상황에서 절대적인 조건이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 대부분은 어딘가에 취직하려 하니까 나도 그걸 안 할 순 없다. 그런데 난 뭔가를 해봤자 안될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다. 그건 내가 이제까지의 삶에서 반복적으로 확인한 나라는 인간의 실상이다. 내가 뭔가를 이룰 수 있을 리가 없으므로 취업준비를 하는 것은 쓸데없는 노력이 된다. 어디에도 가닿지 못할 노력을 구태여 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노력을 할 수 없게 몸이 아픈 것이다. 공부를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몸이 아픈 것이다.
다르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난 나란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 없이 막연하게 남들에게 번듯해 보일 수 있단 이유로 은행원이 되려 했다. 은행원이 돼야 하는 나만의 이유가 없었다. 왜 해야 하는지가 뚜렷하지 않은 채로 엄청 열심히 하다 실패했고, 의자에 앉을 수 없는, 취업준비를 할 수 없는 형태로 아픔이 나타났다. 이 증상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네가 별 마음도 없는 것에 더 이상 죽자 사자 매달리지 마. 일단 네가 살고 싶은 모습은 어떤 것인지 고민해 봐.
은행원을 포기하고 나서 몸이 엄청 아파졌지만 은행원을 준비하는 도중에도 몸은 아팠다. 실패했을 때와 노력하는 과정에서의 차이는 무엇일까? 왜 실패했을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안 좋아지고, 뭔가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도중에는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견딜 수 있는 통증이 나타난 걸까?
노력하는 과정에서는 안될 것 같지만 어쩌면 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는 있으므로 노력을 어느 정도 이어갈 수 있을 정도로만 몸이 아픈 것이다. 실패했을 때는 해봤자 안된다는 것, 노력하는 게 헛수고란 걸 분명하게 확인했으므로 어떤 노력도 할 수 없는 형태로 몸의 아픔이 나타난다.
즉 노력하는 도중에도,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도 내가 가진 기본전제는 '해봤자 안된다'이다. 뭔가를 되기 위해 노력하는데, 속으로는 안 될 것 같다고 믿으므로 쓸모없는 노력을 안 해도 되는 방식으로 신체증상이 나타난다. 노력하는 것은 고되고 힘든데 안될 일에 힘을 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난 언제부터인가 은행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은행창구 직원들이 서류를 넘기며 직인을 탁탁 찍어대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흥, 나는 저렇게 판에 박힌 서류 작업만 하면 숨이 막힐 거야. 이렇게 자유롭게 글 쓰면서 사는 게 백번 낫지'
한 은행이 금리가 높은 특판예금을 만들었다가 너무 많은 사람이 신청해 손해가 날 것 같으니까 고객들에게 예금 해지를 부탁했다는 기사를 보고 속으로 욕을 몇 번이나 했다. 자기들은 대출이자 몇 달 못 갚으면 조용히 웃으면서 담보로 잡힌 아파트를 빼앗아가면서 어떻게 뻔뻔하게 저런 부탁을 하는 걸까? 자기들은 선처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고객들에겐 선처를 부탁할 수 있는 걸까? 마치 악덕상인이 법인의 형태로 구현된 것 같아.
<분노의 포도>에서 '은행은 사람하고 달라요. 사실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은행이 하는 일을 싫어하지만 은행은 상관 안 합니다. 은행은 사람보다 더 강해요. 괴물이라고요. 사람이 은행을 만들었지만 은행을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같은 구절이라도 발견하면 괜히 마음이 동해 메모해 두었다. 은행에 들를 때마다 창구직원에게 <분노의 포도> 읽어봤냐고, 선생님도 사실 은행을 싫어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두 형제가 악덕은행을 털어서 은행대출금을 갚는다는 줄거리의 <로스트 인 더스트>란 영화를 좋아했다.
은행에 대한 내 반감은 책과 기사를 읽고 스스로 사유하여 만들어낸 생각이라기보다 은행원이 되려 했지만 되지못했던 나의 열등감이 뒤틀린 형태로 드러난 게 아니었을까. 내가 오랫동안 돈 많다고 잘난 척이나 한다고 기억하고 있었던 그 은행 면접관은 사실 나를 위로해 주고 뭐든 도움을 주려했던 친절한 사람이기도 했다. 난 은행에 대한 건 뭐든 부정적으로만 인식했던 것 같다.
돌아보면 난 내가 취업준비하고 몸이 아팠던 시절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취업준비하다 몸이 아팠고, 몸이 아파서 더 이상 취업준비를 못했다는 식으로 막연하게 정리했다. 이제는 몸이 나았으니 상관없는 과거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드라마 체르노빌의 대사처럼 '원인을 알지 못하는 사고는 또 일어나기 마련'이다. 난 오랫동안 내가 겪었던 아픔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그 아픔을 비슷한 양상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겪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