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는 사람 Oct 20. 2024

삽질의 역사(1)

전역 후 대학에 복학한 후 나는 금융권에 취업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복학을 했으니 취업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취업카페를 들락거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연봉이 높은 금융권에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특별히 돈을 많이 벌고 싶었던 것도 아니면서 금융권 취업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됐는데 내가 은행원이 되려 했던 건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번듯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교내 취업센터를 방문해 취업상담을 받았다. 상담팀장은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40대 중반의 여성이었는데 '보험계통은 실적압박이 심하니 은행이 제일 낫다, 학점 4.0에 토익 900은 되어야 한다, 금융자격증 3개는 기본이다'등의 조언을 해주었다. 취업전문가라면 뭔가 특별한 조언을 들려줄 줄 알았는데 취업카페에서 본 정보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였다.     


나는 3학년 때 학과를 경영학과로 변경했다. 금융권 취업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원래 있던 곳은 지구환경과학과였다. 과학에 관심도 없고 문과였던 내가 이과인 '지구환경과학과'를 갔다는 것은 특별히 가고 싶은 과는 없는데 남들 가는 대학을 안 갈 순 없으니, 성적에 맞춰서 대충 대학에 들어갔다는 걸 뜻한다. 더불어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고 잘하는지'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단 것, 삶을 어떻게 만들어갈지에 대해 전혀 생각이 없었단 걸 말해준다.     


전과를 했더니 아는 사람이 없어 혼자 수업을 들었다. 나는 늘 주눅이 들어있었고, 웃으며 어울리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혼자 다녀서 덜떨어져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시험은 언제 치고, 시험범위는 어디까지고, 교수가 집어준 내용은 무엇이고... 내가 일일이 안 챙기면 알 방법이 없어서 졸려도 꾹 참고 수업을 들었다. 아는 사람 없이 혼자 수업 듣고 밥 먹는 생활은 삭막하고 쓸쓸했다. 하긴 전과하기 전이라고 해서 학교 다니기가 즐겁진 않았지. 난 사람들 무리에서 늘 겉돌았으니까.     


금융권에 취업하려면 학점을 잘 받아야 한다고 했다. 경영학과는 내가 있던 학과보다 입학점수가 훨씬 높아서인지 다들 공부능력의 평균치가 높았고 학점을 잘 받기가 어려웠다. 시험 일주일 전부터 공부했다가 첫 시험에서 C, D를 수두룩하게 받은 후부터는 시험 삼주 전부터 학교에 남아서 공부를 했다. 나는 남들보다 책 읽는 게 느렸다. 만화책도 남들보다 읽는 게 느려서 중학교 시절 만화책을 돌려볼 때 뒷차례 애를 속 터지게 만들었다.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앉아 있었지만 남들이 시험범위를 다섯 번 정도 되풀이해 볼 때 나는 두세 번 읽는 게 고작이었다.     


토익은 도대체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남들은 2-3개월만 공부해도 성적이 쑥쑥 오르던데 나는 500점을 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토익공부를 하며 더럽게 재미없다, 지루하다, 이게 영어실력이랑 무슨 상관이야? 란 생각을 자주 했다.     


금융자격증도 있어야 했다. 증권투자상담사니, 파생상품투자상담사니 하는 자격증이 기본적으로 3개가 필요했고, 추가적으로 더 난도가 높은 자격증도 필요하다고 했다. 방학 때는 오전에 계절학기수업을 듣고 나면 도서관에 가서 불법 다운로드한 증권투자상담사 인강을 듣고 문제를 풀었다.     


몸 여기저기가 아파왔다. 왼쪽 무릎이 아파서 이따금씩 하던 농구를 잘 못하게 됐다. 늘 조심조심 걸어 다녔다. 이따금 상태가 안 좋아질 때는 하루종일 집에 웅크리고 있을 때도 있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맡고 연골에 이상이 있나 싶어 관절내시경 수술로 안쪽을 들여다보기도 했는데 별 이상이 없다고 했다. 농구를 좋아해서 자주 했는데 농구를 하면서 무릎에 무리가 간 게 아닐까 추측했다.   

  

목과 허리도 아파왔다. 책상 앞에 앉아있으면 목과 허리근육이 딱딱하게 굳고 아파왔다. 당시 나는 척추에 부담을 안 주려고 허리와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독서대까지 사용해 책을 보았다. 몇 시간씩 고개 숙여 책 보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됐다. 상당히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자세였지만 그렇게 안 하면 몇 시간씩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공부량이 많아지는 시험기간에는 도서관에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남들처럼 계속 앉아있을 수가 없어 이따금씩 인적 드문 곳의 벤치를 찾아 누워있곤 했다. 평소부터 척추가 휘었었고 자세도 안 좋았는데 그간의 스트레스가 서서히 나타나는 것이라 추측했다.     


매일 한 시간씩 학교운동장을 걷고 틈틈이 스트레칭을 하고 물리치료를 받으며 스펙 만들기를 이어갔다. 열심히는 했지만 지원자들에게 요구되는 학점과 토익점수를 맞추는 게 버겁게 느껴졌다. 스스로가 몸집보다 몇 배나 큰 짐마차를 끄는 노새처럼 느껴졌다. 기본적인 조건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허덕이는데 그것을 넘어 취업까지 해낼 수 있을까? 난 부정적인 생각을 억누르며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억지로 믿으려 했다.     

3학년 2학기때 금융권 취업준비생들을 대상으로 한 모의면접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실제처럼 진행된다고 해서 친구한테 정장을 빌렸다. 며칠 동안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에서 하게 될 일분 자기소개도 되풀이해서 외웠다.      


면접관은 지방은행의 연수원 원장으로 있다는 50대 중반의 사내였다. 마른 체격에 안경을 썼고 정수리 쪽 머리칼이 휑했다. 자기 연봉이 1억이라는 말을 하며 자신만만히 웃었다. 교실 앞쪽에서 3명씩 돌아가며 면접을 보고, 나머지 학생들은 자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경영학과 수업에서 가끔씩 보았던 여학생이 면접받는 걸 보았다. 우선순위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또박또박 소개했고 면접관이 어떤 질문을 하든 조리 있게 답변을 잘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난 자기소개를 할 때 엄청 경직돼 있었고 말하다 외웠던 게 생각이 안 나서 한동안 정적이 흐르기도 했다. 면접관이 지원동기나 금융상식이나 은행일에 대해 묻는데 죄다 모르는 것들이라 어버버 제대로 답변을 못했다. 아이고,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머릿속이 새하얗게 된 채로 면접시간이 지났다. 내가 절망한 건 면접관이 쉬는 시간에 내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를 했기 때문이다.   

  

'괜찮다, 연습하고 공부하면 더 나아질 수 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라'는 취지의 말이었다. 얼마나 덜덜 떨고 안돼보였으면 면접관이 위로까지 하려 할까. 그 교실에서 면접관이 힘내라고 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모의면접에서 가장 꼴불견이었던 사람은 나였단 말 아닌가.    

 

모의면접을 하고 며칠이 지나면서 나는 자연스레 은행원이 되려는 생각을 접게 되었다. 나는 간이 작고 소심하고 낯선 상황을 만나면 딱딱하게 굳는다. 실제 면접이면 모의면접보다 더 심하게 긴장하고 떨게 될 것이다. 스펙을 맞추는 것도 버겁지만 정말 힘들게 힘들게 그 스펙을 맞춘다고 해도 면접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면접에 통과한다한들 어리바리하고 말귀도 잘 못 알아듣는 내가 빠릿빠릿하고 머리회전도 빨라야 하는 은행에서 일할 수 있을까? 나는 면접에 취약한 사람이니까 면접비중이 작은 직장, 공무원처럼 시험 봐서 들어가는 곳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1년 넘게 해온 은행취업준비를 간단하게 그만뒀다. 크게 아쉽거나 안타깝지 않았다. 애초에 은행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 일이 흥미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고,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지도 잘 몰랐다. 막연히 남들이 좋다니까 하는 것이지 내가 바라서 선택한 게 아니다. 취업을 안 할 수는 없는데 남들이 선망하는 번듯한 곳이고 돈도 많이 번다니까 해본 것이다. 은행, 은행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은행에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이제 다른 직장을 알아보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동안 해온 노력은... 뭐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어?

이전 06화 걸어라, 어쨌든 걸어라(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