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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Oct 04. 2024

걸어라, 어쨌든 걸어라(1)

퇴원한 첫날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저녁 무렵 패딩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섰다. 내가 사는 아파트 후문 오른편에는 대운산과 무지개 폭포로 이어지는 좁다란 이차선 도로가 있다. 차가 별로 다니지 않고, 주변으로 논밭이 듬성듬성 있어서 주민들이 산책로로 애용하는 길이다. 주인이 전직 호텔주방장인 중국집과 원룸텔, 횟집을 지나쳐 걸어간다. 예전에 산책할 때는 설렁설렁 다녔는데, 죽기 살기로 운동해 보라던 H의 조언이 떠올라 되도록 힘차게, 빨리 걸어보려 애쓴다. 요새는 병마(?)와 싸우느라 살이 빠지고 기력도 떨어졌다. 자꾸 감기는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팔을 앞뒤로 흔들며 계속 걸어간다.      


길 따라 가로등이 점점이 켜져 있다. 이곳 이차선 도로에는 인도가 따로 없다. 가끔 차가 쌔앵- 지나갈 때면 도로변 화단에 바싹 붙는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생각을 정리해 보려 애쓴다.      


약을 먹는 대신 운동과 식이를 시도하게 돼서 다행이야. 전혀 다른 방식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심리상담사와 의사를 알고 있단 건 운이 좋은 거야. 먹으면 피곤하고 졸리고 가렵고 설사나는 결핵약을, 사흘만 먹어도 진이 빠지는 그 약을, 1년도 아니고 2년이나 먹어야 된다고? 만약에 2년 동안 고통을 꾸역꾸역 참으며 약을 먹었는데, 재발해서 다시 약을 먹어야 된다면 얼마나 참담할까? 나는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예술맨션 분리수거함이 있는 삼거리를 지나면 경사 30도 정도의 오르막길이 있다. 그래, 이 정도는 올라줘야 운동이라고 할 수 있지. 끄엉, 끄엉 앓는 소리를 내면서 한 발 한 발 올라간다. 오르막 중간 지점에는 커다란 통유리 너머로 운동기구들이 보이는 세련된 이층 주택이 있다. 밝고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트레이너들이 기능성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운동지도를 해주고 있다. 운동선수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켜 주는 운동센터 같다. 소매가 닳은 낡은 패딩을 걸치고 밑도 끝도 없이 동네를 배회하는 나의 막가파식 운동과 비교가 된다.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이따금씩 길가 주택에서 풀어놓고 기르는 개 한 마리가 호다닥 뛰쳐나와 종아리에 엉겨 붙을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가슴이 쿵 내려앉아 얼어붙은 듯 서있었는데 알고 보니 사람을 좋아하는 붙임성 좋은 개였다. 머리랑 등을 쓰다듬어주면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배를 드러내고 드러눕는다. 나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네를 걷다가 전봇대나 담벼락에 틈나는 대로 오줌을 싼다. 오르막 끝부분에 다다를 때쯤에는 숨이 차고 허벅지가 뻐근하다. 걷기 운동은 타원형으로 나 있는 동네길을 빙빙 도는 식으로 이루어지는데 1시간 10분쯤 걸으면 세 바퀴를 돌게 된다.  

   

집으로 돌아오면 K에게 하루동안 먹은 음식과 수행한 운동과 그날의 체중수치를 보내야 했다. 만보기 앱을 사용해서 몇 보를 걸었는지 셌고, 다이어트 앱인 팻시크릿에 하루동안 먹은 음식을 기록했다. 보통은 체중감량을 위해 이용하지만 난 그 반대였다. 음식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칼로리가 계산되는 앱이었는데 어떤 음식을 얼마만큼 먹고 있는지 자각하는데 도움이 됐다.     


내가 메시지를 보내면 K는 '오늘 참 잘하셨군요, 완전 잘했어요, 대단해요'라고 칭찬하고 격려해 주었다. 운동과 식이기록을 살펴보고 걷는 양을 만보로 늘리라든지, 음식섭취량을 더 늘리라는 조언을 했다. 한날은 저녁때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평소 걷는 양의 절반 정도밖에 못 걸었다. 처음 진료를 받을 때 K가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못 했으면 못 한대로 솔직하게 말하면 돼요'라고 했던 게 생각나 있는 그대로 적었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사천보 모자라게 걸었으면 런지를 몇 개나 더해야 할까요. 80개? 100개?' 솔직하게 말하라는 게 혼내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K는 '치료 효과를 보려면 정해둔 과제를 철저하게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 정해진 운동량은 만보인데 어떤 날은 7000보, 어떤 날은 8000보, 또 어떤 날은 쉬어버리면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치료 기간이 한없이 길어질지도 모른다'라고 덧붙였다. 백번 옳은 말이었다. 노력을 100% 다해보는 것과 80%만 쏟는 것의 차이는 20%가 아니라 100%, 200% 이상 일지도 몰랐다. 이것은 K가 삶을 대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 닫는 개인병원이 많은 시대에 K의 병원이 환자들로 붐비는 건 그가 자신의 일에 그만큼 철저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운동을 제대로 못한 날은 숫자를 바꿔서 적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게 보통 일이 아니란 걸 이내 깨달았다. 거짓말을 제대로 하려면 내가 한 거짓말을 일일이 기억해야 하고 그 거짓말이 다음날의 운동 성과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한다. 수치 하나하나를 꼼꼼히 뜯어보는 이 집요한 의사를 속이는 건 보통일이 아닐 테고 나는 그렇게 세밀하게 거짓의 세계를 만들어낼 만큼 치밀한 사람이 못되었다. 진실을 말하고 혼나는 편이 차라리 낫고, 가장 맘 편한 것은 어떻게든 정해진 운동량을 해내는 것이었다. 또 운동은 내가 건강해지자고 하는 것인데 거짓으로 속여 적는 것이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한 번은 직장에서 3박 4일 일정으로 다른 지역으로 교육을 가게 되었다. '다른 곳에서 숙박을 하게 돼 평소처럼 운동하고 음식 챙겨 먹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노력은 해보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우선순위를 착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석 씨에게 가장 중요한 건 몸상태를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래서 못하겠다가 아니라,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운동과 식이를 지속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대책을 세워주시길 바랍니다.'라는 것이었다. K는 정해진 운동과 식이요법을 실천하는 것에서 예외를 두지 않았다. 그에게 진료받았던 중소기업 사장님이 독하다고 했던 게 어떤 뜻이었는지 이해가 됐다.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노력해 보겠단 뜻이었다고 스스로를 변호하고픈 맘도 들었지만 그냥 알았다고 했다. 상황이 안 따라준다고 대충 넘어가는 게 아니라 안 좋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라는 의사의 말이 분명 맞았기 때문이다.


일류와 이류의 차이는 아마도 이 철저함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어떤 경우에도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원하는 목표를 이뤄내는 게 아닐까.     


나는 치료받는 동안 종갓집 시어머니를 대하는 며느리처럼 순종하기로 했다. 의사가 무슨 말을 하든 '넵! 옙! 알겠습니다!' 하고 따라보기로 마음먹었다. 이 의사는 분명 아주 견고한 동아줄을 내려주려 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밧줄을 꽉 움켜쥐고 죽어라 내 몸을 끌어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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