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수영
워킹맘으로 산다는 건 직업이 두 개 라는 얘기다. 방구석 1열에 앉아 세상만사를 다 체험할 수 있는 시대라지만 일하는 엄마라는 자리는 늘 생존과 과로사의 경계에 있는 삶이라는 걸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퇴근하면 엄마로서 출근 시작, 회사 일과 집안 일 사이에서 늘 마음 졸여야 하는 수비수 같은 자리라 수영은 이제 그림의 떡이다.
살다보면 피클 뚜껑조차 한번에 안 열리는 날이 한 번 씩 찾아온다. 자유수영 종료 한 시간 전, 나의 소중한 60분을 모두가 모의한 것처럼 야금야금 갉아먹는 그런 날이 있다. 늘 일찍 오시던 이모님은 그날따라 오 분 정도 늦으셨고, 아기는 허겁지겁 수영가방을 챙겨 드는 나를 붙잡았다. 자유수영 종료 40분 전, 천신만고 끝에 입장한 수영장에서는 하필 이백분의 일의 확률로 고장난 락커 키를 받아들었다.
락커는 손잡이를 돌릴 때 마다 자꾸 '삑.삑!' 소리를 냈다. 열쇠가 고장이라는 걸 알리는 건지, 내 인생이 어딘가 잘못됐다는 걸 경고하려는 건지, 락커의 그 절박한 외침을 들었을 때 이미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까짓 열쇠가 뭐라고. 온종일 일을 하고, 몸이 부서져라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까지 해내는 내가 딱 한 시간만 수영을 해보겠다는데 이것까지 내가 하고 싶은 걸 못하게 하나 싶었다. 자유수영 시간 종료 20분 전. 드디어 들어간 수영장에서 내 수경의 오른쪽 패킹이 사라진 걸 발견했다. 이것이 제발 오늘의 마지막 불운이길 바라면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영을 할 요량으로 수경의 오른쪽 렌즈를 노패킹 수경을 쓰듯 꾹 눌렀다. 그리고 물 안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수영장에서 울면 눈물이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었다.
수영이 도대체 뭐라고 나만 이런 '생쑈'를 하며 사나 싶었는데 친구 S는 둘째의 백일이 지나자마자 새벽 수영을 선언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몰아치는 '뺑뺑이'를 돌고 싶어서란다. 워킹맘 수영인 J씨는 오리발을 짊어지고 출근하며 그날은 반드시 수영장에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친정 엄마가 아이를 돌보고 남편은 정시 퇴근을 하기로 해 모든 '셋팅'이 완벽해 보였던 그날, '오늘 늦는다'는 남편의 전화 한통에 J씨는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 마다 나는 왠지 서글퍼 한참을 울고 싶어진다.
'그래, 그깟 수영이 뭐라고.'
언젠가 록쌤이 이런 말을 했다. 물은 공기보다 밀도가 800배 정도는 높아서 뭍에서 사는 우리가 물 속을 헤쳐 나가려면 최대한 몸을 날렵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인간은 물고기처럼 매끈한 유선형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우리 몸의 모든 부분은 물 속에서 저항을 안고 있다. 그래서 물과 싸워 이기려 하지 말고 물고기나 스케이트날 만큼 몸을 날렵하게 '요리조리 요령 있게 잘 빠져 나간다'는 느낌으로 움직여야 한다.
워킹맘 수영인들이 '그깟 수영'을 절박하게 하려는 이유는 워킹맘을 둘러싼 세상의 밀도가 너무나 높아서다. 일과 육아가 우리를 빽빽하게 포위하고 있어 세상과 싸우지 않고 몸을 최대한 납작하게 만들어 요리조리 요령 있게 빠져나가는 일에 익숙해져버렸다. 이미 우리의 온 몸을 저항으로 밀어붙이는 높은 밀도에 이미 적응해 버려 어쩌면 소음조차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고요한 물 속이 물 밖 보다 더 편한지도 모르겠다.
록쌤은 또 '중립 포인트'라는 말도 했다. 다리가 가라앉지도, 상체가 가라앉지도 않는 우리 몸의 중립, 이상적으로 물 위에 떠 헤엄칠 수 있는 완벽한 유선형의 세계 말이다. 수영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에게 그런 완벽한 유선형의 세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하지만 일하는 엄마들은 언제나 일과 가정 어느 한 쪽도 가라앉지 않는 완벽한 중립 포인트를 요구받는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한동력장치처럼 엄마들은 자신의 몸을 늘 이상의 세계로 채찍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리발 가방을 들고 길을 잃은 워킹맘을 본다면 그들을 당장 가까운 수영장으로 안내해주시기를. 그들이 가장 자유로운 물 속에서 숨을 쉬거나 몰래 울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