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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이 Jun 10. 2019

우리 모두 '야옹이 올림픽'

어쩌다, 수영

"선생님 저 수영대회에 나가요"


어느 날 록쌤에게 한 학생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 학생이 지역 수영 대회에 출전 신청을 낸 종목은 단거리 배영. 아마추어 수영 대회를 앞두고 집중 개인 강습으로 기록을 끌어올리려는 사람은 드물지 않다. 그런데 학생의 수영 경력이 독특했다고 한다. 자유형과 배영만 배운 사실상 초급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 학생이 록쌤을 찾아온 것은 대회를 한 달 여 남긴 시점이었다. 대회 규정에 맞게 스타트는 해야 하니 록쌤은 스타트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는 오로지 발차기만 연습시켰다고 한다. 발차기 외에 다른 기본기에는 투자할 시간도 여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록쌤이 처음 제대로 된 스타트로 그의 기록을 쟀을 때 그 기록은 사실상 '기록'으로 의미가 없었다고 한다. 그 말은 곧 메달권 밖이라는 의미였고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마침내 대회 날 록쌤에게 대회 기록(집중 킥 훈련으로 엄청나게 단축한!)이 담긴 문자가 도착했다고 한다. '선생님 덕분에 저 6등했어요!ㅋㅋㅋ'라는 기쁨 가득한 문구와 함께.


물론 늘 기본기를 강조하시는 록쌤이 이 이야기를 통해 내게 주고자 한 교훈은 '발차기'였다. 아무리 단기간이라도 기록을 대폭 줄일 수 있을 만큼 킥 훈련의 힘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늘 수영에 있어서는 이상한 의문을 품는 학생인 나에겐 또 다른 궁금증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메달 가능성이 없는 거라면 도대체 왜 출전한 거지??'




나는 승산이 없는 싸움은 시작하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한번 뛰어든 싸움에서는 반드시 끝장을 보고 만다는 것이다. 듣기만 해도 피곤한 이런 성격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형성됐다. 태어나기를 '플랜맨'으로 태어난 나는 무언가 목표를 정하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목차와 플로우 차트가 생성됐다. 갖가지 경우의 수가 자동으로 정리돼 결국에는 그 시기가 언제든 성취하고자 한 걸 끝내 얻어내고 말았다. 사람 사는 일은 계획대로만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건 나이를 한참 먹은 뒤였다.  인생에는 늘 암이나 디스크 같은 복병이 있었고, 때로는 계획조차 세울 수 없는 일들에 부딪혔다. 멍청한 실수를 금세 잊는 일, 시간을 되돌리는 일,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 어떤 상황에서든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 같은 것들이 그렇다.


수영을 시작한 뒤로 사람들은 '대회에는 안 나가느냐'라고 묻는다. 물론 이제 수영을 시작한 '수린이' 주제에 대회는 꿈도 못 꾸는 처지라는 것은 둘째 치고, 나는 내가 대회를 목표로 세운다면 내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안다. 내가 메달을 딸 수 있는 현실적인 종목과 훈련 시간, 훈련량, 유능한 코치, 그에 필요한 시간과 전략 등등을 지금이라도 당장 슬라이드 다섯 장 이내로 그럴듯하게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늘 그랬듯 끝내 해내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원대한 계획과 투지가 인생에 긍정적 영향만을 끼치진 않는다는 것을, 아니 어떨 때는 독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어렴풋이 아는 나이가 됐다.


딸에게 그림책을 읽어 줄 때면 부모를 위해 쓴 것인지 아이들을 위해 쓴 것인지 알쏭달쏭할 때가 있다. '모두가 일등인 야옹이 올림픽'이 그렇다. 야옹이 올림픽에서는 모두가 일등이다. 참으로 기가 막히게도 야옹이 올림픽의 결승점은 제멋대로 구불구불하기 때문이다. 힘들면 쉬었다 가도, 그리고 친구에게 은근슬쩍 의지해도, 빙글빙글 엉뚱한 길을 돌다가 다시 돌아와도 모두가 일등이다. 대신 할퀴면 안 된다는 귀중한 교훈도 담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다들 각자의 속도로 결승점을 통과하고 마침내는 수북이 쌓인 메달을 순서대로 하나씩 나눠갖는다. 그리고 커다란 생선을 놓고 다 같이 신나게 서로를 축하한다.

어쩌면 그 이름 모를 학생은 자신만의 '야옹이 올림픽'에 출전했는지도 모르겠다. 나 같은 속물 결과지상주의자는 '그럴 거면 왜 대회에 나가느냐'는 질문을 던지겠지만 그의 레이스 너머에는 '아름다운 완영'같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의미가 있으리라. 기록도, 심지어 완영에 대한 목표도 없이, '6등 할 거면 뭐하러 출전해?'라는 시선 따위 아랑곳 않고 그저 그 초단위 경쟁의 세계에 아무런 목표 없이 일단 몸을 던져 보는 일, 그리고 그 무대에서 남들이 앞서 가든 말든 신명 나게 놀아보는 일을 내가 마지막으로 경험한 게 언제였을까. 무엇보다 메달이나 기록없이, 누군가에게 순수한 기쁨으로 내 성취를 알린 적이 있었나. 나는 죽기 전에 그런 신나는 수영을 해 볼 수나 있을까.


"힘들면 잠깐 쉬어도 된다냥! 모두가 일등인 냐옹이 올림픽이다. 냥!" 할 때마다 딸은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

'현실에 이런 경쟁은 없어. 쉬면 끝이야. 모두가 일등일 수는 없어' 나는 속으로 말한다.


하지만 딸이 한번쯤은 구불구불한 자신만의 결승점을 통과했으면 한다. 그리고 나 역시 이미 조금 늦었지만 은근슬쩍 기대기도 하고, 늘어지게 한 숨 자고 일어나 고양이처럼 느릿느릿 우아한 걸음으로 결승점을 지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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