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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이 Oct 03. 2019

"효리처럼 수영할래" -인생은 평영 2

어쩌다, 수영




"이거야! 내가 하고 싶은 수영"


저도 밀짚모자쓰고 수영하고싶어요, jtbc '캠핑클럽'



어느 날 오후 날아든 동생의 카톡에는 바다 수영을 즐기는 이효리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드넓은 바다에서, 얼굴을 주꾸미로 만드는 수영모자도 없이, 유유자적 헤드업 평영을 즐기는 이효리라니..


동생은 자유형과 배영밖에 못 한다. 집 어딘가에 동생이 교내 대회에서 배영으로 딴 메달이 굴러다녔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초등학교 때 잠깐 물장구를 좀 쳤을 뿐 어른이 된 뒤로는 제대로 수영을 배운 적이 없다. 몇 년 전 방콕과 치앙마이에 빠져 '저병'만큼 무섭다는 '힙스터병'에 걸린 듯하더니 태국 리조트에서 수모와 수경 없이 풀메이크업으로 우아하게 할 수 있는 헤드업 평영, 효리 영법을 하겠단다.


"동생아.. 미안하지만 이건 아직 나도, 엄마도 안 배운 거야"

"뭐야, 이거 어려운 거였어?"


유튜브 영상에 흐르는 효리의 수영 모습에 너무나 여유가 넘쳐 수영을 하는 내내 고개를 들고 있어야하는 헤드업 평영이라는 게 사실은 얼마나 어려운 건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동생은 고등학교 동창이자 절친인 수영강사 친구에게 '5만 원 줄 테니 속성으로 가르쳐달라 해보겠다' 의기양양하게 대답하더니, 잠시 후 다시 풀이 죽어 카톡을 보냈다.


"평영, 아니 평영 발차기부터 마스터하고 오래"

"..."


맞다. 헤드업 평영을 위해서는 평영을 먼저 마스터해야 하지. 아니 그보다 평영을 마스터하기 위해서는 평영 발차기부터 마스터해야 하지. 문제는 초급반에서 가장 많은 낙오자가 생기는 단계가 바로 '평영 발차기'라는데 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다. 물론 운동신경이 특출나서, 혹은 타고난 연습벌레라 남들보다 조금 빨리 배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깨치지 않으면 낱말을 읽을 수 없듯 어떤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영영 마스터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


평영을 향한 구애의 댄스.jpg(평포자들이여, 따라해보세요)  swimcoachingblog.com




핑클 멤버가 모두 모인 방송으로 인터넷에는 요즘 드문드문 '핑클 레전드 무대'나 '핑클 데뷔 시절'같은 사진들이 올라오곤 한다. 때로 어떤 유명 인사들의 모습을 오랜 기간 지켜보다 보면 내가 나이를 먹는 만큼 그 사람도 함께 나이 들어간다 느낄 때가 있는데 바로 효리가 그렇다.


효리는 언제나 어떤 단계를 밟아가고 있었다. 돌연 인디 가수와 결혼할 때도, 제주에 내려가 청귤과 고사리를 수확할 때도, 유기견과 교감할 때도 그랬다. 한 방송에 나와서 '작은 결혼식'은 없다며, 그게 사실은 얼마나 호사스럽고 돈이 많이 드는 일인지 털어놓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보다 열 살은 어린 후배 탑 가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하는, 그보다 더 어린 팬을 흐뭇하게 지켜볼 때며, 오랜 기간 연락하지 못한 멤버에게 쑥스럽지만 솔직하게 전화로 속 마음을 털어놓을 때가 그랬다.


인생의 어떤 순간을 뛰어넘지 않으면 우리는 영영 자라지 못한다. 시간이 무심히도 흘러 추억 속 스타가 됐음을 인정하는 것, 나보다 더 어린 후배의 성취를 받아들이고 웃을 수 있는 여유, 그럼에도 마음 한켠에는 어딘가 허전함과 허무함이 늘 있다는 걸 털어놓을 줄 아는 솔직함 말이다. 어떤 서운함과 오해, 뾰족뾰족 유치하고 못난 감정들을 입밖으로 꺼낼 수 있는 용기 같은 것. 그저 미디어에 비치는 허상이든, 그게 아니든 적어도 효리는 어떤 단계를 밟아가고, 고민하고, 차곡차곡 내적으로 성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여유는 유유자적한 효리의 수영에 묻어있다.


남들보다 많이 늦어도, 마침내 평영 발차기를 끝낸 사람은 어떻게든 평영으로 전진한다. 인간은 개구리가 아님에도 개구리같이 헤엄쳐야 하는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평영을 마스터했다는 건 언젠가는 우아하고 유유자적한 헤드업 평영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췄다는 의미다.


좌절하고, 속상해하고, 열등감을 느끼고, 조급해하며, 마침내 시간이 흘러 그 모든 걸, 사실은 그때 내가 그랬노라 털어놓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나이를 얼마나 먹든 언제든 조금씩 자랄 것이다.



커버 이미지: jtbc '효리네 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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