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이탈리아에 오기 전 수년 동안 나에게는 낙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낙이 궁금했나 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상대방의 "나도 낙이 없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위안을 삼고 싶기도 했던 것 같다.
그날도 습관처럼 내 앞에 있는 그에게 그렇게 물었다.
"당신은 낙이 뭐예요?"라고
그 사람이 대답했다.
"내 낙은 너"라고...
그렇게
"내가 누군가의 낙이 되었다."
사귀자는 간지러운 말 대신 우리는 이렇게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고, 지금은 결혼 2년 차의 투닥투닥 친구 같은 부부가 되었다. 로마에서 만나 지금은 베네치아에서 살고 있다.
결혼식날, 지중해 태양에 그을려 시커멓게 탄 신부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만나 연애를 시작했지만 사실 첫 만남은 시리도록 추운 겨울날 대구의 어느 막창집 에서였다. 그때 그는 로마에서 여행 가이드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무턱대고 시작했다 쫄딱 망한 사업의 빚을 갚고 있었다. 서로가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지인 A를 통해서 우연히 밥을 한 끼 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그 날 이후 그는 로마에서 나는 대구에서 각자의 삶에 집중하느라 바빴지만 그러다 문득 처음 알게 된 그의 직업이 궁금해졌다.
해외여행 가이드라... 며칠을 몰두하여 인터넷 검색을 했고,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에 들어왔던 프랑스 파리의 여행 가이드 공고를 보고는 이력서와 면접에서 나를 제발 뽑아달라고 애걸복걸해가며 필사적으로 구두 계약을 받아냈고,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월급은 얼마를 줄 건지도 묻지 않고 카드빚 독촉을 피해 무작정 "여행 가이드"라는 일을 빌미로 프랑스 파리로 떠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정말 겁이 없어도 너무 없던 날것 그대로의 나였다. 그 날의 결단 덕분에 지금 나는 팔자에도 없던 유럽 이탈리아에서 그중에서도 베네치아에서의 장기전을 계획하고 있다.
그 후 파리에서 이탈리아로, 이탈리아에서도 시스티나 소성당의 미켈란젤로 천장화 밑에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연히 다시 재회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의 그 드라마틱한 상황은 누가 봐도 운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를 다시 회상해 보자면 우선 반가움이 가장 컸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막막하고 새로운 나라에서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본 안면이라도 있는 누군가를 만났다는 것이 그저 반가웠는데 우리가 만나서 이렇게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될 줄은 그땐 꿈에도 몰랐다.
인생은 정말이지 결과를 알 수 없는 타이밍의 연속이다.
시스티나 소성당에서 우연히 만났던 날 그때서야 우리는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자연스럽게 주말 데이트를 시작하며 서로를 알아갔다. 나는 꿈에도 몰랐지만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남편은 우리가 로마에서 처음 만났던 그 날 이 여자와 결혼하겠다 직감했다고 했다.
로마의 새벽, 삼각대를 놓고 누구의 도움 없이 둘이서 찍은 셀프 웨딩 사진
그나저나 로마에서의 데이트라니.. 연애라니... 누가 들으면 그저 로맨틱할 것만 같지만 사실은 그 장소와 상황과 타이밍 모든 것들이 우리를 결혼으로 몰고 갔다. "몰고 갔다"는 표현 말고는 적합한 표현을 찾기가 힘들지만 우리가 결혼을 해야 할 시기에 서로를 만났고, 호감을 가졌고, 자연스럽게 연애도 결혼도 하겠다 마음먹었으니 결혼으로 "몰고 갔다"라는 표현이 얼추 맞아떨어질 것 같다.
그렇다고 이 남자와 억지로 결혼했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서로 사랑해서 죽고 못 사는 결혼은 아니었지만
운명처럼 만나 무덤덤하게 이어져 온 지금까지의 사랑이 나는 너무 좋기 때문이다.
어제는 요즘 부쩍 피곤해하며 잠이든 남편을 보며 문득 뭉클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세상 모든 가장이 다 고생하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심지어 우리에게 아직 책임져야 할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남편은 이 먼 타지에서 가장이라는 무게를 혼자 짊어지고 있다. 내가 과연 어떤 부분의 무게를 덜어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본다. 가끔은 남편이 힘들 때 온몸에 힘을 빼고 온전히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아내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서툴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발전적인 방향을 끊임없이 생각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그것도 이탈리아에서 말이다.
무엇보다도 처음 그때 그 마음처럼 오래도록 당신에게 낙이 되는 아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오늘도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