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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키거 Oct 06. 2024

순례자 박물관을 소개합니다

Day 8 나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엽서

2024년 9월 11일 수요일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 자원봉사 Day 8


새로운 봉사자분들이 도착하셨다
고요한 이른 아침의 산티아고

 

 요 며칠 기온이 뚝 떨어져 아직 9월 초인데도 최고기온이 겨우 20도 안팎이라고 한다. 최저온도가 10도가량 되니 이른 아침에는 정말 높아야 12도 정도로 춥다는 거. 걸어가기 위해 아침 일찍 숙소는 나설 때는 꼭 초겨울만큼 추운 온도에 잠시 몸을 움찔하지만 싱그러운 공기를 마시며 걷다 보면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한적한 골목들을 지나 산티아고 대성당이 가까워지기 시작할 때 어느샌가 그 사이로 빼꼼하고 성당이 보이는 순간은 늘 감탄 그 자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게 만드는 산티아고의 모습은 순례자들로 북적거리는 오후보다는 이런 고요한 아침에 더 아름답다. 온전히 나의 것 같은 기분이랄까. 앞뒤로 길을 재촉하는 사람 하나 없이 여유 있게 사진을 찍고 행복에 차 대성당을 지나 순례자 사무실로 향해본다.

 오늘도 사무실이 열기도 전에 기다리고 있는 순례자들과 함께 날씨 이야기도 하고, 몇 시에 왔는지 어디에서부터 걸었는지 등의 소소한 이야기를 하며 함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본다. 우리들의 대화는 모두가 아는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완주한 그들의 기쁨과 고단했지만 가치 있었던 여정 등 한번 시작하면 끝내기가 아쉬울 정도로 공감 속에 짧지만 짙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늘 즐겁다.

 

 오늘은 새로운 자원봉사자들이 투입되는 날이라 사무실이 한껏 더 붐볐다. 게임 속의 캐릭터가 부스터를 달아 공격력이 더 강화되는 것처럼 이렇게 함께 일할 봉사자들의 숫자가 늘어나니 너무 든든하다. 물론 내가 일하는 속도나 접하는 순례자의 수는 다른 날과 전혀 다를 게 없지만 그냥 좋다. 아마도 한 때 순례자였던 우리가 지금은 순례자들에게 콤포스텔라를 발급해 드릴 수 있다는 그 기쁨과 감동을 공유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미래의 친구들이기 때문일 거다. 우연찮게 내 자리 왼쪽 오른쪽 모두 새로운 자원봉사자분들이 자리를 잡으셨다. 왼쪽에는 72세의 브라질태생 알베르티뉴 할아버지가 앉으셨는데 네덜란드에 사시며 더치, 영어, 독일어, 포르투갈어를 하시는 언어 능력자에 포르투갈길을 5번이나 걸으신 포르토 길 전문가이시다. 게다가 내 오른쪽에는 이제 막 9번째 순례길을 마치고 바로 봉사자로 합류한 미국에서 온 드니스 아줌마가 앉으셨는데 평소 가족들과  K드라마를 자주 보고 현재 딸이 제주도 여행 중이라고 하신다. 양쪽에 앉은 새로운 봉사자들과 함께 이런저런 순례길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정말 즐겁게 일한 하루였다. 늘 새로운 사람들에게 듣는 그들만의 순례길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기 마련인데 5번, 9번씩 여러 길을 걸은 분들에게 듣는 이야기라니! 아직까진 손쉽게 그려지지는 않지만 내가 나이가 들었을 때 이분들만큼 여러 번의 순례길을 걷게 될지 거참 궁금해진다.


 오! 오늘 처음으로 이스라엘에서 온 순례자를 맞이했다. 폴란드, 체코, 노르웨이, 아르헨티나 등 하루에도 세계각국에서 온 다양한 순례자들을 맞이하지만 이스라엘분은 처음이라 조금 신기했다. 대략 인구의 75% 가 유대교에 이슬람이 18% 정도를 믿는 나라이기에 기독교와 카톨릭을 믿는 비율은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1% 미만이라던데 순례길을 걸으시다니 신기하다 싶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나도 종교적 이유로 순례길을 걸은 것이 아니었으니 이분이 카톨릭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너무 모순이었던 거 있지. 사실 종교적 이유로 걷는 분들이 반이라면 비종교적인 이유로 개인의 성찰이나 또는 모험으로 걷는 분들도 많다는 걸 이곳에서는 자주 까먹곤 한다. 성지 중 하나인 이곳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지내며 나도 모르게 종교적 마인드가 자연스럽게 탑재되어버렸나 봐. 거참 겨우 열흘남짓 있었으면서 이곳 산티아고의 카톨릭 분위기에 흠뻑 젖어있는 나는 영원한 F인가 보다. 웃기지도 않아 정말. 순례길은 종교적 의미를 가진 분들에게는 종교적 의미를, 개인적인 의미를 가진 분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자체적 의미가 있는 모두에게 열린 길이라는 걸 잊지 맙시다! 우리 각자에게 하나의 부름일 수도, 도전일 수도, 힐링일 수도 있는 수만 가지 의미의 순례길은 알아서 그 의미를 찾아가면 되는 거다.


순례자 박물관을 소개합니다

 

 오늘같이 오후 2시에 끝나는 아침 근무는 오후시간을 산티아고 시내에서 보낼 수 있어 너무 좋다. 오늘은 근무가 끝나고 예전부터 한 번은 꼭 가봐야지 생각했던 순례자 박물관을 가기로 했다. 이 박물관은 산티아고 대성당 오른쪽에 있는 곳으로 무료에 평이 좋아서 어떻게 구성해 놨을지 매우 궁금했다. 박물관에 들어가니 무언가 새로 리모델링을 한 곳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설이 모던하고 새것 같은 게 쾌적하다. 일단 메고 있는 짐들은 따로 보관해야 관람이 가능해서 지하에 있는 라커에 1유로(사용 후 반환됨)를 넣고 가방을 넣은 뒤 같은 층에 자리한 특별 사진전부터 시작해 본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순례의 개념을 담은 사진 전시가 꽤나 흥미로웠다. 그리고 1층으로 올라와 본격적인 관람을 시작하는데 이미 1층부터 여기는 산티아고와 순례길에 대해 집중적으로 구성해 둔 곳임이 확 와닿을 정도로 유물과 이야기가 가득하다. 산티아고 성인의 동상들, 이야기들의 유래 등 순례자에게 재밌게 다가올 전시들이 많으니 정말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박물관보다는 미술관을 더 선호하는 편인데 그런 나에게도 순례길과 순례자라는 집중된 주제가 있어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까지 흥미롭게 둘러보았다. 나 같은 미술관덕후들의 취향에도 맞는 현대작가들의 설치미술과 그림, 사진 작품들도 있어 아주 즐겁게 봤으니 적어도 순례자라면 어느 한 부분에서든 재밌다고 느낄 수 있는 박물관임이 분명하다.


순례자 박물관의 전시물들, 아래 두 사진은 Ramón Pinal의 ULTREIA

 

 나는 그중에서 설치 작품인 Ramón Pinal 작가의 ULTREIA가 매우 인상 깊었는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한 순례자들에서 기부받은 워킹스틱을 모아 만든 작품이라 저 각각의 워킹스틱들이 담고 있을 수많은 이야기들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순간 작년의 내 이야기가 비디오처럼 스쳐 지나가는 듯한 묘한 감동도 받았는데 정말 저들의 땀냄새가 느껴질 것만 같이 아주 강렬한 작품이었다. 신기하게도 서양인들은 폴보다는 저리 투박한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잘만 걷는단 말이지. 약간 가오라고 할까? ‘마, 순례자라면 원래 이리 나무 들고 걸어야 하는 거 아이겠나!’ 이런 느낌을 받곤 했는데 이렇게 라몬 피날의 작품에도 군데군데 보이는 현대식 폴 보다는 역시나 나무지팡이가 주를 이루는구먼. 그래도 감동은 감동이다. 하나의 심플한 작품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게 예술의 힘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이곳 순례자 박물관은 전시물들의 종류와 개수가 매우 풍부하고 방대한데 반해 이동공간은 넓고 쾌적해 여유로운 관람이 가능하다는 게 참 좋았다. 채광도 좋아서 관람하는 내내 갑갑한 느낌 없이 편한 느낌이었고, 다른 유명 박물관에 비해 사람도 북적이지 않아 오후 한적한 시간에 가면 정말 조용한 가운데 집중해서 관람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장점이 될 것 같다. 박물관에 큰 흥미 없는 내가 대강 둘러봐도 40분이 훌쩍 지났으니 상영하는 비디오들이나 영상들까지 꼼꼼히 눈여겨보시는 분들이라면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의 관람 시간을 생각하시길 바란다.


순례자 박물관 (Museum of Pilgrimage)
위치 : Praza das Praterías, 2, 15704 Santiago de Compostela, A Coruña, 스페인
운영시간 : 월요일 휴무, 화-금 : 오전 9:30 ~ 오후 8:30, 토요일 : 오전 11:00 ~ 오후 7:30, 일요일 오전 10:15 ~ 오후 2:45
관람료 : 현재 무료 (일요일 전체와 토요일 특정 시간에만 무료라고 표기는 되어있는데 최근 순례자의 후기를 봐도 다른 날에도 무료입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전시내용 : 순례길 관련된 유물들을 포함한 비디오 상영, 사진 외 설치작품과 미술품 포함해 장르가 매우 다양함
예상 관람시간 : 대강 둘러봐도 30분, 천천히 시간 갖고 둘러보시면 1시간 예상, 박물관 스타일 좋아하시는 분들은 그 이상
시설 평가 : 지하에 있는 락커룸과 화장실까지 새 거에 깨끗해서 쾌적한 관람 가능


Dear. 나의 순례길 사람들에게
엠빠나다 전문 가게인 El Trébol

 

 순례자 박물관을 보고 밖에 나오니 슬슬 배가 고프다. 이제 산티아고에서 보낼 날들이 일주일도 안 남았기에 가기 전에 먹어봐야지 하고 골라놓았던 가게 중 하나인 El Trébol에서 엠빠나다를 먹기로 했다. 평소에도 명랑핫도그나 커리부어스트 같이 나라의 식문화를 담은 음식, 스낵이면서도 식사만큼이나 맛깔나고 적당한 포만감을 주는 작은 음식들을 좋아한다. 그냥 내 취향인데 대단한 레스토랑에 자리 잡고 앉아 서빙받는 좋은 디쉬들보다 길거리에서 대강 먹는데 맛이 기똥찬 거에서 느끼는 희열이 더 크다고나 할까. 게다가 그 나라의 문화색이 담긴 거라면 완벽. 오늘은 그런 계열로 엠빠나다를 선택했는데 솔직히 이 가게의 평이 그리 좋진 않지만 산티아고에서는 그나마 엠빠나다만 전문으로 하는 곳에다 난 스페인에서 엠빠나다를 꼭 한번 먹고 싶었단 말이지. 엠빠나다가 지금은 아르헨티나나 칠레, 멕시코등에서 더 유명하지만 원래 유래는 스페인이고(식민지 시대에 라틴 아메리카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아직 이곳 갈리시아 지역에서는 인기 있는 음식이기에 이곳 산티아고에서 먹기 딱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찾아간 El Trébol는 이미 밖에서부터 다양한 엠빠나다를 볼 수 있어서 비주얼적으로 확 당기는 매력은 있었다. 나름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된 다양한 맛들이 있어 고르는 재미도 있었다고 할까. 하몽과 치즈, 바비큐, 매운 고기 맛 등등 먹고 싶은 건 많았지만 추천을 받아 가장 잘 팔린다는 양송이, 베이컨, 치즈가 함께 들어있는 엠빠나다와 시금치, 치즈 엠빠나다로 선택했다. 그 자리에서 오븐에 다시 따뜻하게 구워주시는 덕에 길을 걸어가며 아주 맛나게 먹어 버렸지. 일단 빵 자체가 내가 좋아하는 겹겹의 가벼운 패스츄리 형태라서 마음에 들었고 맛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딱 그 맛이라 너무 튀지 않고 무난하게 먹을 수 있었다. 단지 둘 다 치즈가 들어간 메뉴였는데 식감 있는 진짜 치즈보다는 꾸덕한 치즈맛의 소스로 많이 대체하려 한 것 같아 아쉬웠다고 할까. 쭉 늘어지는 치즈는 아주 조금 들어있었다. 게다가 개당 3유로(한화 4400원)인데 비해 크기도 작아 스페인의 물가가 저렴하다는 것과 길거리 음식 모티브라는 걸 생각하면 비싼 가격이었다. 엠빠나다를 한번 먹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한번 추천하겠지만 내가 엠빠나다가 엄청 당기지 않는 이상 지나가다가 다시 들릴 것 같진 않았다. 2유로라면 오다가다 이맛저맛 다 먹어볼 것 같은데 가격이 아쉽네 그래. 어쨌든 이렇게 갈리시아 지방에서 엠빠나다 먹기도 완성!

 

Mori Café에서 산티아고 동기들에게 엽서 쓰기

 

 기분 좋게 부른 배로 느려진 걸음의 산티아고 산책을 하다 지난주 일요일에 맛있는 커피에 치즈케이크를 먹었던 카페 Mori Café 를 다시 찾았다. 깔끔한 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어서 찾았는데 종업원 분이 며칠 전 내 주문을 받으셨던 분이셨고, 내가 아메리카노를 부탁하며 물 좀 더 넣어달라고 부탁하니

 “ 그 물 많이 넣은 거 맞지? 나 정확히 기억해.”

 하며 내가 원하는 커피를 잘 만들어 주겠다는 듯이 찡긋 웃어주신다. 아 이런 센스 넘치는 직원 정말 너무 사랑스럽니다. 나는 이름을 부르는 힘과 사람을 기억하는 힘이 정말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서비스의 가치를 가진 사람을 만나니 너무 고마웠다. 그것도 한국에서 아주아주 멀리 떨어진 스페인의 북서쪽 끝에 있는 산티아고에서 말이야. 알아도 모른척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순간에도 ‘내가 널 기억하고 있어.’라는 표현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거 이거 여기가 내 단골이 될 상이로구먼.

 다정한 직원분이 가져다 주신 완벽한 내 스타일의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오늘은 여러 장의 엽서를 쓰는 시간을 갖아본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오니 순례길을 같이 걸었던 우리 언니를 포함한 J 씨, 메구미에게 이곳의 기운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간 날 때 틈틈이 사놓은 엽서들을 꺼내 어떤 사람에게 어떤 엽서가 더 좋을지 골라본다. 순례자들의 열정과 인내, 그 행복한 기운이 가득한이 곳 산티아고에서 사랑과 기원을 담아 보내는 엽서는 조금 더 색다르길 바라며 오늘 오후는 조용하게 나에게 중요한 사람 그리고 고마웠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보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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