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장의 신나는 자원봉사자

프랑스 순례길을 이제야 한 바퀴 완성한 느낌

by 몽키거
한번 순례자는 영원한 순례자인가

최근에 코감기가 걸렸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아주 건강한 신체덕에 병치레라면 2-3년에 한 번 옅은 감기 정도 걸릴까 말까 한데 이번이 그때인가 보다 싶었다. 다행히 몸 컨디션도 좋고 열도 없이 콧물만 가득하고 목만 조금 큼큼하다. 분명 방금 코를 풀고 돌아섰는데 순식간에 코가 또 맺힌 느낌이 든다. 뭐 어쩌겠어하고 킁하며 들이마신다. 근데 좀 너무하다 싶게 5분이 멀다 하고 이 행동을 반복하다 보니 불현듯 산티아고 걸을 적 생각이 났다. ‘아! 나 산티아고 때 딱 이랬었지!’ 어쩐지 뭔가 익숙한 느낌이었지 말이야.

2023년 프랑스길을 걷기 위해 마드리드에 3일 전에 도착했었다. 난생처음 도전하는 순례길에 나는 물론이고 우리 신랑도 같이 긴장해 굳이 배웅을 하겠다며 이탈리아에서 스페인가지 따라왔다. 장대비가 왔다 갔다 하는 우중충한 날씨의 연속이었지만 내 순례길 시작 전의 긴장을 녹이기에 가족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내가 좋아하는 프라도 미술관도 가고 레드벨벳 케이크가 맛있는 작은 카페도 찾아다니며 예비 순례자의 긴장을 잠시 내려놓고 여행자처럼 즐기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산티아고로 떠나기 하루 전 기침이 시작되었지 뭐야. 이렇게 난감할 수가. 세상 아프지 않은 내가 순례길이라는 일생일대의 큰 도전을 앞두고 하필 출발 직전에 감기에 걸려버렸다. 아… 솔직히 조금 억울했다. 절대 아프지 않은 나에게 왜 하필 지금 딱 골라 감기를 주신건지… 당황스러움을 넘어 ‘엥? 몇 년간 많고 많은 날들 중에 굳이 지금?’스러운 게 오히려 황당하다고나 할까. 다행히 열이 나거나 몸이 으슬으슬 춥지는 않아서 나름의 괜찮은 컨디션으로 일단 출발했다. 뭐 어쩌겠어. 가야 하는 길 가야지.

그런데 길을 걸으며 문제가 발생했다. 얼굴 타는 게 싫어 탄성 있는 운동용 스카프로 코부터 목가지 커버하고 걸었는데 이게 숨 쉴 때마다 살짝씩 코를 막는 거. 그때도 지금 걸린 것과 같은 코감기였기에 걷는 내내 이분 삼분이 멀다 하고 한 번씩 코를 들이마시며 걸어야 했다. 코를 들이마실 때마다 스카프가 코 안으로 강하게 빨려 들어오듯 내 코를 막는 기분이 영 불편하기만 했다. 그리고 십 분에 한 번씩은 멈춰서 스카프를 다 내리고 휴지에 코를 풀어야 하는 게 얼마나 귀찮고 힘들던지. 이 콧물 가득한 코감기만 아니면 내가 두 배는 더 편하고 훨씬 빨리 걷겠다 싶었다. 간단히 지나갈 것 같았던 코감기가 그렇게 일주일 동안 나의 첫 순례길과 함께했었다는 웃픈 이야기.

2023년 나의 첫 순례길이었던 프랑스길의 추억

오늘은 지금 걸린 이 코감기가 내 순례길을 떠올리게 해 준다. 이렇게나 저렇게나 일상의 작은 찰나들이 너무나 쉽게 순례길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한번 순례자는 역시 영원한 순례자인가. 가끔은 이게 단순한 추억인지 아니면 그리움인지, 아니면 무의식 중에 다시 시작하고 싶어 꿈틀대는 열정인지 헷갈린다. 이렇게 한번 순례길을 걸어 순례자가 된 사람의 마음은 더 고요해지지 않고 휴화산처럼 보이는 활화산처럼 마음속이 늘 다음 순례길에 대한 희망과 열정이라는 붉은색의 용암으로 들썩들썩 인다. 거참 설명할 수 없는 거친 갈증 같아 보이겠지만 나는 나름의 평화가 깃들어있는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생장의 신나는 자원봉사자

2023년 프랑스 순례길을 걸은 지가 벌써 만 2년이 지났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시간은 참 빨리 흘러간다. 2024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에서의 2주간의 콤포스텔라 발급 봉사활동을 하고 2025년 프랑스 생장에서 8일간 크레덴셜 발급 봉사활동을 하고 나니 뭐랄까… 나의 프랑스 순례길이 이제야 완벽하게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프랑스길을 시작했던 생장에서 순례자여권을 발급받고 첫 도장을 찍었던 설렘과 얼떨떨함에 31간의 웃고 울었던 프랑스 순례길, 그리고 산티아고에 도착해 콤포스텔라에 적힌 내 이름을 보며 느꼈던 안도와 담담함이 모두 담긴 나의 큰 여정. 모든 여정의 시작부터 끝까지 내가 순례자로 느꼈던 것들을 봉사자가 되어 함께 공감하고 힘이 되어드릴 수 있었던 비현실적인 경험이 완료되었다. 이제 프랑스길과 관련해서 나는 봉사자와 순례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은 다 한셈이다. 일부러 이 봉사들을 다 해봐야겠다고 계획했던 건 아니지만 무언가 속이 후련하다.


순례길을 다녀온 후 까미노블루와 향수에 젖어 고민하다 찾아보게 된 순례자 사무실에서의 자원봉사 경험은 내게 크나큰 선물과 같았다. 항상 사람들과 교류하고 공감하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순례길이라는 일생일대의 도파민 넘치는 도전이라는 공통점과 단순한 길이 아닌 각자의 마음의 짐과 사연들을 갖고 찾은 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더욱 특별했다. 각자의 그늘이 다른 순례자의 따스함으로 해가 비치는 순간도 있었고, 마음과 마음이 맞닿을 때 감사의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다. 가끔은 순례자들의 슬픔과 행복을 통해 내가 회개를 하는 느낌까지 들곤 한 그 열기. 내가 이유 없는 관용과 따뜻함에 이렇게 굶주려있었나 싶을 정도로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들이 넘쳐났던 순간들은 순례길을 넘어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에서 또 생장 순례자 사무실을 따뜻함으로 가득 채웠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감사한 경험일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과 생장의 순례자 사무실


순례자로서 걷는 순례길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고 내 안의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라면 순례자 사무실에서의 지원봉사 경험은 새롭게 순례자로 거듭날, 또 거듭난 사람들과의 만남과 그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삶에 대한 감사함과 인류애를 충전할 수 있는 기회다. 내가 걷는 순례길이 마음속 작은 불을 짚일 수 있는 시작이라면 순례길 자원봉사는 그 불씨들이 서로 모르는 이들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음을 경험하는 자리랄까. 내 경험을 통해 느낀 나만의 순례길 키워드가 나에 대한 재발견, 도전, 배움, 느림의 미학, 자유라면 순례자 사무실 봉사활동의 키워드는 따뜻함, 사랑과 관심, 인류애 충전 같았다. 결이 같을 것 같으면서도 놀랍게도 많이 달랐는데 그래서 더 신선한 충격과 함께 내가 순례길에서 지은 웃음과 흘린 눈물보다 몇 배는 더 웃고 더 울게 된 이상하게 뿌듯한 경험을 가질 수 있었다.


나의 인생 최대 경험 중 하나였던 순례길을 산티아고와 생장의 순례자 사무실에서 봉사자 입장에서 다른 각도로, 다른 이들의 경험을 통해 볼 수 있는 경험은 아무나 할 수 있지 않기에 더 소중했다. 정말 시간이 된다면 순례자 분들에게 순례자 사무소 자원봉사를 강력 추천하고 싶다. 분명 값진 경험과 큰 추억이 될 것이다.


봉사하는 매일매일 새로운 순례자분들과 함께 나는 순례길을 걷고 또 걸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나도 배우고 더 깊은 생각들을 하며 내면을 바라보곤 했다. 내게 마음을 열어주신 수많은 순례자분들, 그리고 나를 아껴주신 동료 자원봉사자 분들께 사랑을 가득 담아 인사드리고 싶다. 작지만 나누고 싶었던 내 마음을 받아주시고, 그분들의 사연들을 공유해 주셔서 감사했다고 말이다. 짧지만 우리가 순례자 사무실의 작은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눈 그 순간만은 내가 당신의 가장 열렬한 치어리더였고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2025년 5월의

푸른 프랑스 생장에서 나와 함께했던 모든 분들이 언제 어디서나 행복하시길 바란다. Ultreia et suseia! 더 멀리 그리고 더 높이 가시길 늘 기원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부엔 까미노!


2026년 2월 26일 이탈리아에서 당신의 순례길 자원봉사자 몽키거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