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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슬 Jan 21. 2019

현대인을 위한 '간략한 미래 역사' -호모데우스

유발하라리의 저서 '호모데우스'를 읽고


*여러분은 지금 서기슬씨의 '과장법 쾌락주의 리뷰'를 읽고 계십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exaggerated




철학을 공부한 것은 정말 잘 한 일이다. 

좋은 철학서를 읽다보면 안정감과 미묘한 상실감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아주 어려서부터 갖고 있던 막연한 고민들, 그런 것을 나만 고민한 게 아니라 수백 년 전부터 누군가 고민해왔다는 것, 그 자체가 큰 위로가 되기도 했다. 내가 유별나서 이런저런 의문을 갖게 되는 게 아니라, 실은 인류 보편(이라는 것이 있다면)에 조금은 맞닿아 있는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그리고 내 난잡한 고민과 허술한 발상이 무색하게도, 수많은 철학자가 고민하고 토론해서 좋은 글들을 남겨 놓았다는 사실, 그게 바로 안정감의 바탕이었다. 


미묘한 상실감의 정체라면 역시, 내 난잡한 고민과 허술함이 너무 무색해져서, 더 끙끙대며 고민을 전진시킬 필요 없이 열심히 철학서를 읽고 말면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의 자기 잘난 맛에 쉽게 자기 생각에 매몰되는 개인성과 별개로, 어떤 면에서 ‘고전’을 존경하는 전통 속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한 덕분에, 나름의 개똥철학을 전진시키기보다는 열심히 다른 철학자들을 답습하기로 했다. 20대 초반의 일이었다. 사춘기 때에나 했을 법한 이 세상에 대한 고민은, (결론에 대한 이견이 있을지라도)칸트나 헤겔 같은 이들이 훨씬 고도로 정교화해서 그 전개 방법 연구해놓았다. 철학사의 발달은, 인류라는 거대한 자아 하나가 천천히 깨어나는 과정 같았다. 



배움의 효용은 게임의 공략법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배움과 그 고도화된 학습 방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이 다른 모든 동물에 비해 가장 잘 하는 일이다. 최근의 실용음악과 학생들은 악기의 테크닉 면에서 이미 수십 년 전에 우리가 대단하다고 불렀던 아티스트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현대 올림픽 체조 대회에서 꼴지를 하는 선수도, 최초의 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보다 훨씬 뛰어난 신체적 조건과 능력을 갖고 있다. 교육법과 훈련법 그리고 다양한 테크닉이 체계적으로 발달했기 때문이다. 최근의 공대생들이 갖고 있는 지식과 이해의 폭은, 뉴턴 직후의 공학자들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다. 지식의 축적은 우리를 빠르게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한다. 현대인이 역사상 최고로 뛰어나고 대단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업적은 당대 수준과 비교하여 평가 받아야 마땅하고, 지금 우리가 보기엔 당연하거나 별 것 아니어보이는 것들도, 과거에는 혁신적인 내용이었던 것들이 현대를 만들었다는 것에 감사해야할 것이다.


다만 때로는 심도있는 사색보다 단순한 읽기가 더 중요하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인문학적 사고 역시 우선은 학습을 통해 빠르게 현대인 수준에 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마 잘 교육된 웬만한 철학과 대학원생 한 명 정도만 과거로 보내도, 제법 한 종교의 구세주 노릇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역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설득하는 논리를 구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민의 시간과 학습량은 균형을 이뤄야하겠지만, ‘내용보다는 관점’이라고 여겨지는 인문학의 영역에서도, 천재가 아닌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겐, 혼자 고민하고 있는 것보다 학습량을 채우는 게 훨씬 낫다. 단지 다양한 역사적 관점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학습량은 필요하다. 가죽을 손질하는 최신의 방법과 도구들이 발달했는데, 세상 아무와도 접촉하지 않고 수년 째 죽은 동물에서 생가죽을 뜨는 과정에서부터 혼자 독자적인 방법으로 구두를 만드는 장인이 있다고 하자. 그것이 어떤 전통을 계승하고 있거나 유니크한 스타일이라면 의미 있겠지만, 천재적 재능이 있는 장인이 아닌 이상은 결과물은 현대에 4-5년 정규 교육을 받고 체계적으로 숙련된 어린 구두공보다 못할 가능성이 높다. 악기 연주도, 체조도, 공학적 지식도 테크닉만이 전부인 것은 결코 아니지만, 다른 천재들이 쌓아놓은 사례와 방법을 따라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면, 혼자 방구석에서 개똥철학을 키우며 고군분투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현대인을 위한 '간략한 미래 역사'

유발 하라리는 역사학자이지만 아주 오랜만에, 20대에 철학서를 읽을 때에 느꼈던 안정감과 미묘한 상실감을 가져다 준 저자이다. 그의 전작 ‘사피엔스’가 대단한 인기를 끌고 세계적인 명사들에게 극찬을 받았던 이유에는, 아마 그런 감상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나도 인간에 대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로 시작해서 ‘아, 내가 굳이 더 생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 사람이 훨씬 잘 정리해두었군’하는 감상 말이다. 충분한 팩트를 기반으로 잘 정돈된 그 발상을 배워보자. 그렇게 해서 제법 최신의 현대인에 걸맞는 사고 방식을 장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굉장히 즐겁고도 감사해야할 일이다. 철학만 해도 생물학이나 뇌과학, 신경과학의 발달로 그 역할이 변모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유발 하라리는 그 과정에 걸맞는 질문을 도발적이고도 쉽고 설득력 있게 던지고 있다. 후반부에서 앞으로 변모할 인본주의에 대한 부분은, 셜리 케이건 교수님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함께 읽으며 생각해보면 더 흥미롭지 않을까 하는 감상도 들었다. 이상 ‘호모 데우스’를 읽은 감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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