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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슬 Jun 27. 2020

'댄싱하이'의 추억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업자 정신


2018년, KBS에서 경연(서바이벌) 프로그램 '댄싱 하이'를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프로그램 소개를 보면 '10대들의, 10대들에 의한, 10대들을 위한 댄스 배틀 프로그램' 이라고 써 있네요. 우승한 팀에게 상금도 주고 해외 연수도 보내주는 조건이었습니다. 정말로 10대의 촉망 받는 '춤꾼'들이 나와서 경쟁했던 프로그램이었죠. 


댄싱 하이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거나 대중의 이목을 끈 것은 아니었지만, 저에겐 각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프로그램입니다. 저도 사실 헬스장에서 런닝머신에 틀어진 재방송을 우연히 본 후에 흥미가 생겨서 이후에 찾아봤던 프로그램인데 말이죠.  


기억에 남는 이유는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몇몇 출연진들 사이의 '동업자 정신' 때문입니다. 어떤 서바이벌 혹은 배틀 프로그램보다, 출연진들 모두가 큰 틀의 동료 의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여기서 출연진이라 함은 10대 참가자와 코치진 뿐 아니라 종종 등장하는 특별 심사위원까지 모두 포함입니다. '춤', 특히 스트릿 댄스의 세계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만, 그들이 커다란 커뮤니티로 묶여 있다는 인상을 계속해서 받았습니다. 


어느 세계나 판이 좁을수록 한 다리 건너며 다 아는 사이가 되지만, 단순히 꼭 인맥 때문은 아닐 겁니다. 그보다는 아마도 화려한 조명을 받는 아이들과는 또 다른, 정말 춤이 좋아 연습실과 거리를 누비는 댄서들의 감성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한 편 어린 친구들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면 아무래도 우리 사회의 치열한 경쟁과 생존 논리가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에, 보면서도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이 떨어지고 내가 살아 올라가야만 '데뷔'할 수 있고, 승자는 살아남고 패자는 잊혀지는 처절한 게임, 그럼에도 그런 경연에 울고 웃고 또 그것을 추구하는 시청자들의 모습을 모두 보자면, 가끔은 그런 분위기 자체가 좀 무섭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댄싱 하이'에서도 그런 치열한 경쟁 분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수시로 눈에 띄는 '흥'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에 배운 것 같지만 사실 '흥'은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집단의 교감과 감응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경연이 끝나면 서로 포옹을 하고 리스펙을 표현하거나, 혹은 경쟁이 아닌 때에는 함께 춤 추고 서로의 춤을 구경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이, 가끔씩 비춰지는 것이라도 다른 경쟁 프로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바로 위의 이미지는 1:1 배틀 중에 서로 경쟁하는 두 댄서가 손 잡고 함께 춤을 추고, 모두가 즐거워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웃음 포인트는 맨 뒤에 심사위원인데 어느새 일어나서 같이 춤추고 있는 제이블랙 :)



이렇게 댄싱 하이에서는 전체적인 경쟁 분위기가 코치진이나 특별 심사위원의 반응도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가르치는 선생님이기도 하지만 어떤 특별 심사위원은 '저도 그 위에서 같이 춤 추고 싶었어요' 라고 말하고 또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죠. 


이 부분은 댄스계의 문화적 특성도 없지 않은 것 같은데, 많은 배틀이나 대회에서 Judge Show(심사위원이 나와서 보여주는 춤)가 있더라고요. 심판이 되고 나면 마치 영영 현역과는 멀어지는 것과 같은 다른 수많은 장르, 스포츠, 종목과 다를 겁니다. 

https://youtu.be/Z0FJuW1BhtI

무대를 찢어놓는 Lia Kim의 Judge Show를 한 번 함께 구경해보시죠.


스트릿 댄스를 추는 친구들은, 조금 사회 주류에서 멀어져 있거나, 약간은 소외된 영역에서 자기 만의 문화를 구축해나가는 친구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유튜브의 힘 덕분에 그들의 모습을 더 가깝게 양지에서 볼 수 있게 된 점은 댄서와 팬 모두에게 축복이지만, 여전히 더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큰 틀에서 서로의 감성을 공유하고, 큰 연대 의식, 동업자 정신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제가 '댄싱 하이'에서 본 것은 약간의 단서일 뿐이지만, 그 이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업자 정신'이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에서 우리 모두에게는 경쟁자와 심사위원만 남은 것 같습니다. 동료는 스쳐가는 존재일 뿐이고, 서로 끊임없이 무한 경쟁하며 살아남아야하거나 혹은 평가받고 평가받는 관계만 남는 거죠. 


다만 '댄싱 하이'에서 보았던 몇몇 코치나 선배들은, 분명 '동업자 정신'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다른 경연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연습생과 트레이너와의 관계와는 다른 것이었어요. 


그리고 경연에 참가하는 참가자들의 '동업자 정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서로 공정하게 경쟁하려 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존중하고 서로의 팬이 되어주고 응원하기도 하고, 지금은 경쟁 상태에 있지만 길에 나가면 다시 다같이 동료일 것이라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코치진이든 참가자든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들이 몇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겐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어찌 대학원을 다니며 학교라는 공간에 오래 머물러 있고 학계에 발을 반쯤 걸치게 되었습니다만, 교수님 중에서도 그런 분들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이고, 선배이고, 한참 우월적 지위에 있지만, 박사과정 대학원생을 '동업자 정신'으로 대하는 분들이었죠. 물론 그런 분들이 더 큰 존경을 받습니다. 하지만 당장 존경 받는 것보다 더욱 멋진 일은, 후배를 존중하고 동업자 정신으로 대하는 분들이 결국 항상 더 멋진 동료를 계속해서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제가 동료 의식이나 다른 어떤 표현 대신에 꼭, '동업자 정신'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결국 시간이 지나면 성공한 사람끼리는 다 동업자가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문화계 곳곳에서는 선배가 후배를 착취하는, 그래야만 하는 구조가 생겨났던 것 같아요. 인맥으로 발탁이 이루어지고 유명함이 한 곳에 집중되는 효과 등 몇 가지 특성 때문에 특히 다른 분야보다 문화 예술계에 더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최근에는 그런 와중에도, 후배들을 챙겼고 같이 성장했던 몇몇 개그맨들이 다시 주목 받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이제 한 명의 예능 출연자가 아니라 훌륭한 프로듀서가 된 송은이씨처럼요. 


저 스스로에게도 늘 다짐합니다. 동업자 정신을 갖고, 더 많은 사람들과 결국 우리가 같은 '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위치에 있다는 생각으로 대하자고요. 그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늘 필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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