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와 사회계약론

by 아인도

나는 낀 세대 팀장이다. 위로는 열 살 많은 임원에게 보고하고, 아래로는 열 살 어린 팀원에게 지시를 내린다. 나이만 보면 MZ세대에 속하니 팀원들과 정서적으로 더 가까워야 할 것 같지만, 정작 회사와 일을 대하는 태도는 기성세대 임원들과 더 비슷하다. '젊은 꼰대'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SNS와 기사에서 회자되는 ‘요즘 젊은 것들’, 그러니까 MZ세대의 낯선 언행은 나도 직접 겪어봤다. 젊은 팀장으로서 나름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부딪혀보니 당황스러운 순간이 많았다. 입사 하루 만에 퇴사하며 일당은 물론 교통비까지 요구하던 신입, 퇴근 전까지 처리하라고 일을 맡겼더니 “제가요? 팀장님은 오늘 뭐 하시는데요?”라고 되묻던 팀원. 그 순간 나는 어버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이는 MZ지만 정신은 기성세대에 가까운 나. 젊은 꼰대이자 어설픈 리더, 고독한 회색분자다. 조직에 대한 헌신과 책임감을 중시하는 윗세대의 정서와, 개인의 삶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후배 세대의 감각. 둘 다 이해는 되지만,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매일 둘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존재 조건이 다른 세대의 치킨 게임


기성세대와 MZ세대는 각자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들어보면 양쪽 모두 일리가 있다.


기성세대 임원들은 말한다. "능력도 안 되는데 장래성 보고 이 월급 주면 감사한 줄 알아야지 뭐 그리 불만이 많고 요구사항도 많아." "요즘 같은 불경기에 우리 회사만 한 데가 어딨어. 배고파봐야 정신 차리지." "요즘 애들 너무 계산적이야. 이속 다 챙기고 손해 안보려고 하면 결국 본인만 더 마이너스인걸 몰라."


반면, MZ세대 팀원들은 이렇게 말한다. "할 일 다 했잖아요. 왜 남의 업무까지 떠안아야 하죠?" "저 벌써 잡아놓은 (개인)일정 있어요. 다른 사람 찾아보세요." "어차피 몇 년 다니다 말 회사인데, 미리 다른 길 알아보는 게 낫죠." "요즘 알바만 해도 적당히 벌 수 있어서 굳이 직장에 목맬 필요 없어요."


양쪽 모두 단호하고, 확신에 차 있다. 그리고 누구도 한 발 물러서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세대 간 가치 충돌이 아니다. 존재 조건이 다른 두 세대의 ‘치킨 게임’이다. 서로가 발 딛고 선 현실이 다르고, 감정의 문법도 어긋나 있다. 서로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서 어찌저찌 교통정리를 하며 하루를 넘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



사회계약의 조건


루소는 인간이 불안정한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계약’을 맺는다고 주장했다. 개인은 자유의 일부를 공동체에 양도하는 대신, 공동체는 그 대가로 질서와 보호를 제공한다. 이 계약이 성립되면,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지 않고, 이성의 판단과 공동의 규칙에 복종한다. 당장은 손해 보더라도, 나중에 더 크고 만족스러운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태껏 오로지 자신만을 고려했던 인간은 이제 자신이 다른 원리를 따라 행동해야만 하고, 성향의 목소리를 듣기 전에 이성의 충고를 따라야 함을 알게 된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자연이 주는 여러 이점을 박탈당하지만, 그것을 더 큰 것으로 다시 취하게 된다.



한 개인이 공동체에 복종하는 이유는, 그 공동체가 실질적인 이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계약에 서명하고 규칙을 따르는 이유는, 그것이 모두에게 유리한 ‘공동의 이익’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 공동의 이익이 바로 사회를 성립시키는 핵심 연결고리다. 사람들은 바로 이 기반 위에서 이기적인 개인에서 협력하는 구성원으로 전환된다.


각기 다른 이익들에 공통으로 속해 있는 것이 사회의 연결을 만들어 낸다. 모든 이익이 일치하는 어떤 지점이 있지 않다면, 어떤 사회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는 오직 이 공동이익을 기준으로 통치되어야 한다.


사회계약 이론은 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회사의 규율에 따르고 상사의 지시에 복종하는 이유는, 그 대가로 더 큰 보상과 기회를 제공받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옆자리 동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의 자율성과 시간을 일정 부분 포기하고, 귀찮음을 감수하며 매일같이 출근한다. 이기적인 개인이 조직 구성원으로 변모하는 바로 그 동력은, 헌신한 만큼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 가능한 보상’이다.


하지만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공동체로부터 돌아오는 보상이 줄어들거나 불확실하다면? 그때 개인은 더 이상 계약을 지킬 이유를 찾지 못하고, 협력하는 구성원이 아닌 생존을 우선시하는 이기적 주체로 회귀하게 된다.



역사적 효력을 다한 계약서


한때 회사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회계약적 공동체였다. 단순한 고용주가 아니라, 직원의 삶을 함께 설계해주는 동반자에 가까웠다.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월급을 지급했고, 집을 마련할 때는 신용을 보증해주었으며, 은퇴 후에는 퇴직금과 연금으로 노후를 책임졌다. 경제성장과 함께 회사도 꾸준히 커졌고, 승진의 가능성은 높았다. 구성원들은 그 안에서 강한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꼈다.


이에 직원들은 성실함과 헌신으로 보답했다. 밤늦게까지 야근하고, 회식이라는 연장 근무에도 빠지지 않았다. 주말엔 상사와 등산을 가고, 골프를 쳤다. 상사의 부당한 지시나 불합리한 관행에도 참을 수 있었던 건, 언젠가 연봉 인상과 승진이라는 보상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다 자네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는 한마디에 웬만한 감정은 풀렸다.


하지만 IMF 이후, 그 믿음 위에 유지되던 사회계약은 점차 해체되기 시작했다. 정리해고, 성과주의, 외주화, 비정규직화가 보편화되며 회사는 더 이상 보호자도,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동반자도 아니게 되었다. 직원들의 희생이 반드시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고, 이를 본 새로운 세대는 더 이상 과거의 신화를 믿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알고 있다. 열심히 일해도 승진은커녕 생존조차 불확실하다는 것을. 회사 내의 사회계약은 사실상 역사적 효력을 상실했다.



낡은 계약서의 파수꾼


문제는 나 같은 낀 세대 팀장이다. 아직도 나는 ‘회사가 잘 되면 나도 잘 된다’는 오래된 상식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조직의 성장이 곧 개인의 생존과 연결된다는 믿음 속에 여전히 미래를 설계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 역시 기성세대와 함께 낡은 계약서를 지키는 파수꾼이다.


답답한 마음에 리더십 책도 여러 권 읽었다. MZ세대와 소통하는 법, 동기부여 대화법, 공감형 리더의 조건 같은 주제들.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팀장이 많은지, 서점에는 그런 책들만 모아놓은 별도 코너도 있다. 하지만 책 속의 진정성, 심리적 안전감, 수평적 대화 같은 화려한 키워드는 결국 기술적인 해법에 불과하다. 문제의 본질은 따로 있다. 이미 계약이 깨진 조직 안에서, 팀원들에게 내밀 수 있는 '진짜 계약서'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근거 없는 권위에 기대는 리더십은,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해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나 역시 지금의 계약서가 이미 효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회사가 어려워지면,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매각이나 비용 절감을 이유로 언제든 인력 구조조정이 단행될 수 있다. 그런데도 마음 한켠에는 ‘그래도 나는 보상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남아 있다. 게다가 결혼도 해야 하고, 가정도 꾸려야 하기에 지금 당장 새로운 길을 모색할 여유도, 그럴만한 용기도 없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낡고 해진 계약서를 놓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더 이상 아무런 힘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런 계약서를 들고 팀원들 앞에 선다. "회사가 잘 돼야 너도 잘 되는 거야." "힘들어도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야." 정작 나조차도 믿지 않는 말을 건네며 누군가를 설득하려니, 목소리에 힘이 실릴 리 없다.



새로운 사회계약은 체결될까


루소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어제의 법이 오늘의 의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침묵은 암묵적 동의로 간주된다. 주권자가 그것을 철회하지 않는 한, 계속 원한다고 간주된다.


MZ세대는 침묵하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소리치진 않지만, 그들의 행동과 태도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조용한 퇴사, 태업, 부업 준비 등을 통해, 기성세대가 믿고 지켜온 사회계약에 대해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비동의’를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언제든 이 조직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책임감도, 미련도 없다.


이 모든 갈등은 결국 새로운 사회계약이 부재하는 시대이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공동의 이익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는 사익을 포기하고 조직에 헌신하라는 말을 할 수 없다. 개인은 계약 이전의 자연 상태로 돌아가 각자도생을 택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단지 더 이상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공동의 이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사회계약을 다시 맺을 수 있을까? 시간이 오래 걸릴까, 아니면 애초에 가능하기나 한 걸까? 갈등이 극으로 치달은 끝에야 비로소 새로운 합의점이 만들어지는 건 아닐까.


그러는 사이, 낀 세대 팀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팀원들이 출근만 해줘도 감사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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