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
다가오는 3.1절을 앞두고, 거대한 시대의 폭력 앞에서 기꺼이 부서지고 또 버텨내야 했던 사람들의 흔적을 영화 <암살>을 통해 들여다보려 합니다. 그 치열했던 내면을 쫓기 전, 우리는 이들을 부르는 세 가지 호칭의 무게를 먼저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뜻하는 단어에는 그들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나가기 위해 선택했던 처절한 저항의 방식이 담겨 있습니다.
지사(志士):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도 평생토록 독립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버텨낸 삶의 태도 자체에 헌사를 바치는 칭호입니다.
의사(義士): 살아서 돌아올 수 없음을 알면서도, 무너진 정의를 세우기 위해 기꺼이 무력을 들고 적의 심장부로 뛰어든 물리적 결단의 상징입니다.
열사(烈士): 무기 하나 없는 맨몸이었지만, 고문과 죽음 앞에서도 스스로를 불태워 맹렬한 내면의 빛으로 시대를 밝히고 순국하신 분들입니다.
이 호칭들은 단순한 사전적 정의가 아닙니다. 가장 캄캄했던 시대, 인간다운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온전한 삶을 던졌던 처절한 심리적 결단의 결과물입니다. 영화 <암살> 속 인물들과 그들의 뼈대가 된 실제 역사 속 영웅들 역시, 이 호칭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했던 위대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이 비극의 판을 짠 약산 김원봉은 동지들을 사지로 몰아넣어야만 하는 리더의 고독을 짊어진 인물입니다. 실제 역사 속 김원봉은 일제가 백범 김구 선생보다 더 높은 사상 최고의 현상금을 걸 만큼 두려워했던 항일 무장투쟁의 상징이었습니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그 이름값의 이면에는, 수많은 동지들의 죽음을 딛고서라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야만 했던 한 인간의 캄캄한 심연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부름에 응답한 극 중 속사포와 황덕삼은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들로 묘사됩니다. 이들은 실제 의열단 단원들과 신흥무관학교 청년들의 초상입니다. 거사를 앞둔 실제 의열단원들은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을 때 늘 환하게 웃었다고 합니다.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기에, 사진 속에서나마 가장 눈부신 청춘의 모습을 남겨두려 했던 것이죠. 평범하게 삶을 사랑했던 이들이 내린 비범한 결단, 우리는 그 미소에 빚을 지고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처음 가본 경성의 화려한 백화점과 커피 한 잔에 마음을 뺏기는 안옥윤(전지현)의 모습은 그녀 역시 그저 온전한 일상을 누리고 싶었던 평범한 청춘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저격수 안옥윤의 뼈대가 된 실존 인물은 46세의 나이에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며 무장 투쟁에 나섰던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지사입니다. 남편을 잃고 46세의 나이에 만주로 망명한 그녀는 실제로 무장 투쟁에 나서며 일제 총독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끊어진 동지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무명지(네 번째 손가락)를 세 번이나 잘라 혈서를 썼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 무기를 품고 압록강을 넘나들었습니다.
"둘을 암살한다고 독립이 되냐고요? 모르죠. 하지만 알려줘야지.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다고."
안옥윤의 이 대사는 곧 남자현 지사의 삶 그 자체입니다. 그녀의 피 묻은 손가락은 승리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절대적인 억압 속에서도 조선인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증명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온전한 삶을 통째로 땔감 삼아 시대의 어둠을 밝혔습니다.
한때는 누구보다 뜨거웠던 독립군 염석진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동지를 팔아넘기는 일본의 밀정이 됩니다. 우리는 그를 쉽게 욕할 수 있지만, 1930년대는 독립군들에게 가혹한 절망의 시대였습니다. 일제가 만주를 넘어 중국 대륙까지 집어삼키며 승승장구하던 시절, 수많은 이들이 독립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무기력증에 빠져 변절의 길을 택했습니다.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그가 토해내는 이 변명은 희망이 완전히 거세된 시대가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비참하게 갉아먹는지를 보여줍니다. 더 뼈아픈 현실은, 해방 이후 실제로 열렸던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친일 세력의 방해로 무산되면서, 현실 속 수많은 염석진들은 영화와 달리 단죄받지 않고 살아남아 권력을 누렸다는 사실입니다. 염석진이라는 인물은 역사가 처벌하지 못한 부조리함을 스크린 속에서나마 처단하고자 한 우리의 열망이 투영된 존재입니다.
돈만 주면 국적도 불문하고 사람을 죽이는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은 철저히 시대와 거리를 두려 했던 방관자이자 허무주의자였습니다. 국가나 이념 따위는 개인의 삶을 구원할 수 없다고 믿었죠. 하지만 그는 안옥윤이라는 존재를 관찰하면서 서서히 궤도를 이탈합니다. 자신을 던져가며 무언가를 지키려는 그녀의 신념이 텅 비어있던 그의 내면으로 전염되어 들어온 것입니다.
결국 그는 생존을 포기하고 안옥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죽음의 한복판으로 뛰어듭니다.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타인의 진심과 맞닿아 녹아내리는 이 과정은 절망적인 시대 속에서도 결국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사람과의 연대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시대를 견뎌낸 이들의 심리 기록을 들여다보며, 오늘 우리의 일상을 다시 한번 돌아봅니다. 우리가 매일 당연하게 마시는 커피 한 잔과 편안한 밤의 수면은 1930년대 어느 이름 없는 지사, 의사, 열사들이 기꺼이 자신의 내일을 포기하며 건네준 아주 값진 선물입니다. 당신은 영화 <암살> 속 수많은 인물 중 누구의 딜레마와 선택에 가장 깊이 마음이 머무르셨나요? 거대한 폭력 앞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놓지 않았던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뜨거운 불꽃이 있었을지, 오늘 하루 그 시대의 온기를 함께 상상해 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