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우리말을 지킨 사람들

영화 <말모이>

by 잇다

<말모이> 글자 그대로 말을 모은다는 뜻의 순우리말이자,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어학회가 편찬하려 했던 최초의 국어사전 원고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 학교에서는 우리말 사용이 철저히 금지되었고 이름조차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해야만 했습니다. 언어를 잃는다는 것은 단순한 소통 도구의 상실이 아니라 민족의 정신과 뿌리가 통째로 뽑혀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화 <말모이>는 혼란한 시대 속에서 이 땅의 흩어진 우리말을 그러모아 사전이라는 튼튼한 토대를 세워 민족의 영혼을 지켜내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냅니다.






주시경 선생, 빼앗길 수 없는 정신의 뼈대를 세우다






이 위대한 투쟁의 씨앗을 뿌린 이는 바로 주시경 선생입니다. 그는 일찍이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라며 언어가 곧 민족의 얼임을 깨달았습니다. 국권을 빼앗기던 캄캄한 시기에도 그는 전국을 돌며 우리말의 문법을 정리하고 한글의 뼈대를 세우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비록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숭고한 업적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일제의 서슬 퍼런 감시 속에서도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뭉친 그의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국어사전 편찬이라는 투쟁을 묵묵히 이어나갔습니다.






언어가 한 인간의 영혼을 깨우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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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김판수는 제 이름 석 자조차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이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독립이라는 거창한 대의가 아니라 하루하루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팍팍한 생존뿐이었지요. 하지만 사전 편찬 작업에 얽히며 뒤늦게 한글을 깨우치게 된 그는, 길거리의 간판을 더듬더듬 읽어내고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읽으며 타인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고 눈물짓게 됩니다.

판수의 변화는 단순히 글자를 아는 것을 넘어섭니다. 글을 안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핍박받는 동포들의 아픔을 느끼며, 마침내 왜 이 말과 글을 지켜야만 하는가에 대한 주체적인 각성으로 이어집니다. 언어가 한 인간의 닫혀있던 세상을 열고 영혼을 일깨우는 이 과정은 묘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핏줄의 수치를 딛고 선택한 가시밭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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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의 내면은 누구보다 뼈아픈 고뇌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한때 존경받는 지식인이었으나 결국 일제에 굴복하고 친일파로 돌아선 인물입니다. 아버지가 일제가 주는 권력과 생존에 순응할 때, 정환은 핏줄이 남긴 그 수치심을 짊어지고 가장 위험한 가시밭길을 택합니다.

타협하면 편안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가 사전 편찬에 매달린 이유는 아버지처럼 육신의 생존을 위해 영혼(언어)을 팔아넘길 수는 없다는 단단한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나아가 엘리트주의에 빠져있던 그는 전과자인 판수와 부대끼며 지식인들의 고립된 투쟁이 아닌 이름 없는 민중과의 연대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온몸으로 배워나갑니다.






세상을 바꾼 평범한 이들의 조용한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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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전 편찬 작전의 가장 뭉클한 지점은, 이것이 결코 몇몇 엘리트 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데 있습니다. 잡지 광고를 본 전국의 수많은 평범한 백성들이 일제의 살벌한 검열을 피해 자신들의 고향 말과 사투리를 꾹꾹 눌러 적어 보냅니다. 우체국 직원, 시골의 교사, 시장의 상인과 어린 학생들까지. 권력도 총칼도 없던 이들이 발각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편지를 부쳤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그 종이 뭉치들은 단순한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나라를 잃은 암흑기 속에서도 서로의 얼을 잊지 않으려던 조선 민중들의 간절한 안부였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대하여 거대한 역사의 물결을 만들어낸 위대한 기적이었습니다.






같은 말을 쓰면서도 서로를 잃어버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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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묶기 위해 목숨을 걸고 말을 모았습니다. 그 희생 덕분에 마음껏 우리말을 쓰는 지금, 우리는 과연 하나로 연결되어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는 같은 한국어를 쓰면서도 세대와 성별, 이념의 벽에 갇혀 서로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단절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언어는 지켜냈지만 역설적으로 그 언어를 통해 마음을 나누는 법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말모이>가 우리에게 남긴 진짜 숙제는 단순히 국어사전을 완성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파편처럼 조각나고 분열된 이 시대에, 서로를 향한 이해와 공감을 다시 모으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의미의 말모이가 아닐까 생각해 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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