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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telmen Mar 17. 2016

나의 작은 냉장고

양문형 냉장고가 갖고 싶었다. 냉장고 문을 다 열지 않고 문에 달린 버튼 하나만 눌러도 물을 꺼내 먹을 수 있는, 혹은 냉동고 문을 열지 않아도 얼음을 따를 수 있는 그런 커다랗고 간편한 냉장고. 이제 당연시 여겨지는 대표 혼수품목을 내가 결혼할 때 사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문제는 집이었다. 나의 첫 신혼집은 20년된 14평형 아파트였는데, 아파트가 지어질 당시만 해도 냉장고의 일반적인 규격이 양문형이 아니었다 보니, 냉장고 자리라고 주어진 공간의 크기가 맞지 않았다. 주인 아주머니께서 수리비를 대주겠다고도 했지만 자리를 넓히기 위해 배관 위치까지 바꾸어야 하는 큰 공사가 된다고 해서 그냥 그만 두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600ℓ 투도어 일반형 냉장고였다. 화장실 문짝 크기로 드럼세탁기도 포기한 직후였는데, 당시에는 공연한 패배감(?)이 들 정도로 조금 속상했었던 것 같다.


결혼 후 두 번째 집. 마찬가지로 연식이 20년된 빌라라 냉장고를 놓을 자리가 마땅치 않아 아예 공사하면서 냉장고를 위한 가벽을 세웠다. 이제 우리집 냉장고는 빼박캔트...


그렇지만 얼마 안가 양문형 냉장고를 샀다면 틀림 없이 후회했을 거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집에서 밥 먹는 횟수가 일주일에 평균 2회가 채 안 되는 사정에 지금 있는 냉장고도 텅텅 비어 있기 일쑤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 3년이 넘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냉장고 칸칸 가득 살림살이를 채워본 적이 없다. (쓰고 나니 괜한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인가...)

어쨌든 이런 생활 패턴은 나중에 아이가 생기고 난대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900ℓ 용량의 냉장고 1대에 4인 가구의 1달 식량, 혹은 1인 가구의 6개월분 식량을 비축할 수 있다"는 통계도 있다고 하니, 두 세 식구의 배를 채우는 음식들을 저장하기에는 지금의 냉장고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어차피 무작정 넣어 놓는다고 썩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채우고 버릴 바에야 비워두는 것이 낫지 않나. (이러니 TV 프로그램<냉장고를 부탁해>에 냉장고를 꽉꽉 채워 나온 게스트들에게 보내는 환호가 선뜻 이해가지 않는 것이다)


작년 가을에 airbnb를 통해 머물렀던 베를린의 한 가정집. 우리집보다 2배가 넘는 크기에 냉장고는 절반도 안됐다. 우리나라 가전사들도 소형 냉장고 에너지 효율부터 높일 일이다!


작은 냉장고와 함께 살면서 바뀐 태도가 있다면 이것이다. 신혼 초 걸핏하면 가던 대형마트는 이제 두어달에 한번도 잘 가지 않는다. 대신 집 근처 생협이나 재래시장을 이용한다. 그곳에선 때마다 필요한 음식만 사면 된다. 사실 처음엔 당황하거나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 닥치기도 했다. 가령 이런 에피소드. 간편한 김밥 재료를 사기 위해 생협에 갔는데 김은 김대로, 채소는 뿌리채소 줄기채소 다 각기 따로 팔고 있어 결국 아무 것도 못사고 나왔다든지.


그때 주위를 처음 둘러봤다. 마트에 가면 고개를 쳐박고 전투적으로 카트를 끌던 나였다.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오늘 저녁 먹을 거리, 또는 내일 아침 찬거리를 사러 나온 가벼운 차림이었다. 이후에는 나도 차츰 먹을 것을 최소화해서 살 수 있는 것만 사야 한다는 관점이 생겼다. 한꺼번에 장을 보던 습관을 버리니 씀씀이도 줄고 체중(!)도 줄었다. 냉장고에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제품들도 없게 됐다.

그렇게 오늘도 내 냉장고는 평화롭다.



자본주의적 삶의 폐단은 모두 냉장고에 응축돼 있다. 자, 지금 바로 냉장고를 열어보자.보통 위가 냉동실이고 아래가 냉장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냉동실을 열어보자. 검은 비닐 봉투가 정체 모를 고기와 함께 붙어 얼어 있는 덩어리를 몇 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소고기인지, 돼지고기인지 아니면 닭고기인지 헛갈리기만 하다. 심각한 것은 도대체 어느 시절 고기인지 아리송하다. 아니 어쩌면 매머드 고기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냉동실에는 냉동만두가 더 냉동되어 방치돼 있을지도 모른다. 이게 만두인지 돌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이다. 보통 이런 돌만두는 새 냉동만두를 넣으려다가 발견하기 쉬울 것이다.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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