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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telmen Aug 16. 2019

최근의 육아, 고민

요즘 우리 부부에게 가장 힘든 순간은(?) 아이가 자기 전 무한대로 책을 읽어 달라며 조를 때. 눈꺼풀은 무겁고 시계는 벌써 자정을 향해 가고 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해야 하는 나로선, 두 권 세 권, 그것도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반복해 읽어 주다가 "이제 그만 자자"며 아이를 타이르고 결국은 목소리에 힘을 주게 된다.


괴롭다. 다른 것도 아니고 책을 읽어달라고 하는 것뿐인데.

이제 만 33개월. 시청각 미디어를 일찍 접한 탓인지, 아니면 원래 그럴 시기가 아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책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책을 많이 봐도 저와는 상관없는 세계. 다 제 흥미를 갖는 게 따로 있겠지 하면서도, 고작 두 살 배기가 앉은자리에서 몇 권의 책을 진득이 본다는 다른 집 아이 얘기를 들었을 땐 내심 부러웠던 적도 있다.


그런 내 아이가 책을 쌓아놓고 보기 시작했는데. 계속 계속 더 보고 싶다고 하는데. 나는 피곤하다니.


남편과의 대화


아이가 잠들기 직전 항상 같은 걸 하자고 하는 것을 '수면 의례'라고 한단다. 전문가들에 따르면(어떤 전문가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육아서를 제대로 읽은 경험이 없다) 수면 의례는 30분 정도가 가장 좋다고, 매일 일정한 시간을 유지하고 아이와 약속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잘 시간이 됐다는 걸 알면 아이가 다급해져 말한다. "엄마 오늘은 뭐 볼까? 내가 고를게! 아니면 나 하나 엄마 하나 골라서 두 개 볼까?" 책장 앞에서 고심 끝에 책을 고르는 아이. 물론 다 읽고 난 뒤엔 "다시 책장에 가서 고르겠다" "하나만 더 보겠다"고 조를 테지만, 당장은 내게 책을 고를 기회는 두 번밖에 없다는 듯 자못 진지하고 신중하다. 그런 아이의 얼굴과 팔과 다리를 보면서 웃음이 나려는 걸 참는다.

나는 평소 그림책을 많이 사는 편이다. 아이가 없을 때도 그랬다. 색과 그림이 나에게 주는 에너지가 크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도 그럴 것이라 생각해 이제는 아이를 위해 자주 그림책을 고른다. 얼마 전 회사 앞 코엑스에서 유아교육전이 열려서, "남들 다 간다는데" 하는 생각으로 점심시간에 갔다가 "남들은 다 안다는" 유명 영어교재나 교구를 처음 알고, 수많은 엄마들이 해당 부스에 상담을 하기 위해 선 줄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어쨌든 아직까지는 그냥 예쁜 그림책만 산다.


최근 구입한 것 중 아이와 이야깃거리가 많아 좋은 4미터짜리 그림책 <수잔네의 가을> 봄, 여름, 겨울도 있다.


아마도 아이의 책, 그러니까 이야기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 배움에 대한 흥미로 바뀔 때 - 머잖은 일이라고 생각해 두렵다 - 지금보다 더 복잡해질 거다. 특히 7세까지 통합보육을 하는 공동육아 방식, 그러니까 취학 전 단계에서 일종의 대안교육을 선택한 우리 부부에게는 대한민국 부모라면 절대 피해 갈 수 없을 '사교육' 앞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어쩌면 더 빨리 올 지 모른다.

내가 공동육아를 선택한 이유는 심플했다. 맞벌이 가정으로 종일형 보육(오전 7시 30분~오후 7시 30분) 과정을 정당하게, 눈치 보지 않고 누리고 내가 선택할 수 없는 특별활동을 강제당하고 싶지 않았다. 일반 어린이집은 종일형 보육을 맡겨도 4~5시면 돌보미를 구해 보조 양육의 방식을 선택하는 부모들이 많고, 특활비라는 명목으로 정부 보조금 외 부모로부터 월 10여만 원을 더 받는다. 그 돈으로 체육이나 미술 선생님을 요일별로 불러 수업을 진행하거나, 영어뮤지컬 등에 데려가기도 하는데 이전 가정 어린이집을 보냈을 때 나는 그게 정말 싫었다. 고작 20개월 아이에게 장애물 넘기 등을 시키고, 알파벳 동요 시디를 사서 보낸다든가 하는 게. 그렇다고 거부할 수는 없었다. 방 3개짜리 아파트 구조에서 다른 아이들이 거실에서 초빙된 강사와 활동을 할 동안 특활비를 내지 않은 아이들은 다른 방에 격리돼 있어야 한다는데, 주머니 사정 관계없이 어느 부모가 그걸 택할까?


그림이 주는 상상력이란.. 모자 속 동물을 맞춰보며 '빼꼼' 이란 말의 리듬을 특히 재밌어 했다. 어느 날은 이걸 보고 "자동차 같아, 엄마"라고 했다. 29개월 남짓에.


우리 어린이집에선 그런 활동이 일절 없다. 등원이 결정되고 교사회와 처음 만났던 자리에서, 원장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등원을 하면 아침열기를 통해 인사하고, 곧바로 채비를 해 성미산, 놀이터, 시장 등 걸을 수 있는 거리로 오전 나들이를 나간다. 다녀와선 손을 씻은 뒤 밥을 먹고, 옛이야기를 들으며 잠에 들고, 일어나 간식을 먹고 오후 놀이를 하는, 그런 지극히 일상적인 리듬이 매일 반복되는 것만으로 아이들의 에너지는 충족된다. 수족관이나 키즈카페에 가는 것은 부모들이 주말에 이벤트로 해주시면 된다."

공감했다. 일상이 되풀이되는 것에서 아이들은 자란다. 설사 해가 바뀌어서 같은 절기와 흐름에 매번 반복되는 활동을 해도 아이의 놀이는 섬세하게 달라질 것이다. 매일매일 놀면서,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함께 질서를 잡아 노는 법을 알아가고 성장할 거란 얘기다.


사실 5세만 되어도 유치원에 가서 기본적인 한글과 영어를 배우는 우리나라 교육 환경에서 기초적으로 학습이 배제되고 놀이만 하는 어린이집에 7살까지 보낸다는 결정이 쉬운 건 아니었다. 여전히 명확한 확신이나 판단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최소한 아이가 글을 모른다는 조급함은 갖지 않으려고 한다. 최근 터전 커뮤니티에 6살 방 모임 회의록을 보면서 눈길이 갔던 글귀가 있다. "아이들이 숫자, 글자, 영어, 일본어 등에 관심이 많은데, 가능한 늦게 글자를 배우는 게 좋겠다. 그래야 그림책을 읽을 때 글자보다 그림을 본다."


책 <아이야, 천천히 오렴> 의 구절


글자를 알지 못하는 아이가 내가 읽어주는 그림책의 이야기를 기억했다가 이제 책을 펴기만 해도 먼저 말하기도 하고, 나보다 앞서서 얘기하려고 끼어들 때마다 느낀다. 그림으로, 내 목소리로 나보다 더 많은 글을 읽고 있구나. <아이야, 천천히 오렴>이라는 책에서 저자 룽잉타이는 아이가 말을 배우고, 글을 깨는 과정에서 엄마로서 받았던 놀라운 영감을 기록한다. 그래. 급할 게 뭐가 있을까. 어린 시절이 얼마나 짧고 또 얼마나 소중한데.


한 권만 더 보겠다고 조를 때, 아니면 읽은 책을 다시 한번 더 읽어달라고 할 때. 같은 이야기여도 다르게 읽어주려고 노력한다. 혼자 책의 세계로 빠져드는 시기, 그때의 몰입감을 통한 충만함을 아이가 느끼는 날도 기대가 되지만, 아직 아이가 글자를 모를 때 그림을 통해 상상하게 하고 내가 그 상상을 더하는 목소리가 되어주고 있다는 기쁨을 만끽하고 싶다.

아이가 글을 읽고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내가 그랬듯, 아마 부모와 조금씩 멀어질 것이다. 오로지 세상의 중심이 엄마일 때, 엄마와 아빠로부터 얻는 배움이 거의 전부일 때, 더 다정하게 속삭여주고 싶다. 그래서 퇴근길, 푹푹 찌고 흔들리는 전철 속에서 매일 다짐한다. 오늘은 더 재밌게 책을 읽어줘야지 하고.


p.s 위에서 언급한 <아이야, 천천히 오렴>은 대만의 대표적 지식인인 작가가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육아에 전념했을 때 기록을 엮은 에세이다. 내가 태어난 해에, 꼭 지금 내 아이와 같은 두 살 반짜리 아이를 키웠다. 책에서 저자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며 고전이나 동화의 잔혹성을 새삼 느끼며 고민한다. 나 역시 신데렐라의 계모에 대해, 피터팬이 후크선장의 팔을 악어에게 던져준 일에 대해 설명할 때 대략 난감이다. 뽀로로를 보면서는 왜 여아 캐릭터로 나오는 루피와 패티가 분홍색, 보라색 치마만을 입고 또래의 친구들을 위해 빵을 굽고 바느질을 하는지 온통 의문이고 불편하다. 선녀와 나무꾼은 정말 최악이고! 이 책과 함께 저자의 인생 3부작으로 불리는 <사랑하는 안드레아> <눈으로 하는 작별>을 차례대로 읽고 있다. 성년이 돼가는 아이와 편지를 주고받고, 자녀를 떠나보내는 마음, 그리고 부모와의 헤어짐을 기록했다고 한다. 인생 육아서이자 지침서를 만났다!

 

아래 칸에는 안안이 좋아하는 이야기들만 남겨두었다. 아이다의 꽃, 완두콩 이야기, 장난감 병정, 아기 돼지 삼형제... 광푸출판사의 동화전집이 배달되어온 뒤로 안안은 좋아하는 자동차 놀이마저 마다한 채 매일같이 책을 안고 와서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도 책을 가지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곤 했다. 엄마는 키가 높은 의자에 올라서서 안안에게 보여주지 않기로 한 책을 가지런히 나열해보았다. 한 권 한 권 줄을 세우다가 엄마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검열이 아니고 무엇일까? 책들을 미리 검사하고 금지시키는 것이니 말이다. 지금껏 검열이라는 제도를 극도로 혐오해온 엄마였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기분 좋게 웃고 있다니. 검열도 별것 아니구나. 민중을 두 사짜리 어린아이로 여기는 것일 뿐.

<룽잉타이 | 아이야, 천천히 오렴>
인생은 말이야. 넓게 펼쳐진 평원에서 숲으로 들어가는 길과 같단다. 평원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함께 갈 수 있어.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면서 말이지. 하지만 일단 숲에 들어서면 풀숲과 가시덤불들이 길을 막고, 그러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지. 다들 자기 앞만 보면서 길을 찾아나갈 수밖에 없어. 끌어주고 밀어주며 함께 웃고 떠들던 '집단감정'이나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아무 시샘 없이 함께 나누던 '깊은 우정'은 우리 인생에서 청소년기에만 있을 수 있는지도 몰라. 해맑고 찬란하던 그 시기를 지나고 나면 그 뒤론 걸으면 걸을수록 고독해지지. 넌 앞으로 가정에 구속되고, 책임감에 묶이고, 너 자신의 야심에 갇히고, 인생의 복잡다단한 모순들에 짓눌리게 될 거야. 네가 숲 속 깊이 걸어 들어갈수록 찬란한 햇빛 같은 친구는 더 이상 없을 거야. 인생을 알 만한 나이가 되면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말할 수 없는 고독에 몸서리치겠지. 안드레아, 지금은 '다른 무엇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중략)

네가 어렸을 때 엄마는 늘 널 데리고 극장에도 가고 공원에도 갔어. 공원에서는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고, 부엌에서는 밀가루 반죽을 하고, 야외에서는 흙을 가지고 놀고 들꽃을 따고 조개를 줍고 연을 날렸지. 정원에서는 페퍼민트를 기르고 오이를 심고 자전거를 타고 라인강을 따라 멀리까지 나갔지. 이제 넌 많이 커서, 혼자서 바르셀로나를 걸으며 건물들을 보고 조각을 보러 다니지. 엄마는 시무룽 이모의 생각과 같아. 미술수업을 백번 받는 것보다 하루 종일 대자연 속을 걸어 다니는 것이, 건축 설계를 백 시간 가르치는 것보다 오래된 도시 몇 군데를 돌아보는 것이, 또 문학 작법을 백번 듣는 것보다 바짓단이 더러워지도록 시장을 돌아다니는 것이 훨씬 나아. 노는 것은 천지간 학문의 근본이라 할 수 있을 거야. (중략)

숲으로 들어간 뒤의 자유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가시덤불을 제거해 나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야.

<룽잉타이 | 사랑하는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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