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아, 만 세 살 생일을 축하해!
태풍이 지나고 가로수길이 어느덧 노란 잎으로 물들어가던 어느 날, 네가 "왜 나는 매일 터전에 가는 거야?"라는 질문을 했어. 왜 엄마 아빠랑 매일 있을 수 없냐는 귀여운 응석이었지. 내가 대답을 주저하자 아빠는 “엄마 아빠가 매일 회사에 가서 일을 하고 돈을 벌지? 그게 엄마 아빠의 일이라면, 매일 터전에서 친구들과 돌담, 은하수와 놀고 꽃잎이 주는 밥을 맛있게 먹는 게 이현이의 일이야”이라고 대답했지. 엄마는 특별히 답을 못했어.
네가 부모를 필요로 하는 시간은 긴 인생으로 보면 잠깐의 주기일 텐데, 엄마 아빠 손과 눈 마주침이 더 필요한 지금, 우리는 왜 하루 종일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걸까? 정말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일까? 가끔 네가 아침에 이미 출근하고 없는 엄마를 두고 서운할 티를 낼 때, "오늘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이현이에게 줄 선물을 사 갈게"라고 대답하지만, 엄마는 네 장난감을 사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사실 아니란다.
엄마는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해. 글쎄 어쩌면 일 자체를 좋아하기보다는 일을 하는 것에서 오는 나 자신의 효용과 충족감을 크게 느끼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어. 물론 즐거운 만큼 좌절을 겪기도 하지. 그렇지만 거기서 존재감을 느낀다고 할까. 일에서 오는 일희일비의 감정으로부터 나를 계속해 지켜내는 것, 때론 버티고 때론 앞으로 튀어 나가고 때론 한발 물러서고, 그런 것들이 엄마를 움직이게 하는 것 같아.
알겠니 이현아? 엄마도 너처럼 어린아이 시절부터 살아온 시간이 있고 그걸 토대로 지금을 사는 거니까. 그러니까 나는 엄마로서 지금 너를 위해 존재하기도 하지만, 네가 있기 전부터 나는 존재했잖니. 쉽게 설명하기가 참 어렵구나. 젊은 엄마 아빠 사진을 보면서 항상 "나는 어딨냐"고 묻는 네게 이런 말들을 말이야. 그래도 언젠간 네가 알까? 꼭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들긴 하는구나.
어느 날은 같이 동화책을 읽다가 나무 뒤에 숨어 있는 늑대가 토끼를 노리는 그림을 보면서 네가 "엄마, 토끼는 누가 구해주지?"라고 물었지. 그때 나는 "아무도 구해줄 수 없어. 토끼 스스로 도망쳐야 해"라고 말했어. 그러자 처음에 당황한 듯 보이던 네가 "토끼야 힘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너와 나의 관계를 새삼 생각하기도 했다.
토끼 같은 내 딸아. 언젠가 너의 세계에 엄마 아빠보다 중요한 것들이 생길 거야. 그게 친구나 애인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연예인, 어쩌면 부모보다 더 의지가 되는 다른 어른일 수도 있겠지. 우리에게 비밀이 생길 수도 있고, 좌절하는 일이 생겨도 우리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극복하는 법도 배우겠지. 그럼에도 잊지 마. 엄마 아빠는 항상 네가 뒤를 돌아봤을 때 있는 존재가 될 거야. 물론 그마저도 부재하는 시간이 오겠지만 말이야.
그런가 하면 엄마 아빠도 네가 차마 다 알지 못하는 시간들이 필요할 수 있어. 예전에 엄마의 엄마 , 그러니까 너를 사랑하는 네 외할머니가 "엄마는 남쪽으로 간다"라는 쪽지를 남기고 그냥 떠나 버린 적이 있어. 엄마가 대학생이었던 때야. 나중에 알고 보니 할머니는 그냥 무작정 차를 몰고 섬진강으로 갔대. 그곳에서 네 외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엄마는 몰라. 엄마도 엄마의 엄마를 잘 몰라. 우린 모두 엄마와 딸로, 그리고 개인의 인격체로 살아가는 거지. 다만 할머니는 엄마보다 더 외로운 사람이었고, 그걸 혼자 다독이느라 엄마와 많은 걸 나누지는 않았어. 그게 엄마가 할머니한테 느끼던 거리감이자 외로움이었어.
나는 너에게 가급적 내 얘기를 많이 하며 살고 싶어. 엄마도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들이 있다는 걸. 너와 있는 매 순간이 소중하지만,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는 걸. 그냥 아무 생각 없이 TV를 돌려 보거나, 영화를 몰아 보거나, 아니면 책을 쌓아두고 한 권씩 격파하며 읽고 싶다든가. 먼 나라로 여행을 하며 무작정 걸으며 눈으로 풍경을 담고 혼자 커피를 마시고 사진을 찍고 싶기도 하지. 그런 얘기를 너한테 하고 싶어.
나는 네 생일인 오늘 휴가를 내고 영화를 봤고, 책도 한 권 읽었어. 그리고 이렇게 편지도 쓰고 있지. 엄마는 지금의 시간이 참 좋고, 기쁘다. 너가 옆에 없다고 홀가분한 기분은 결코 아니고, 그냥 오롯이 나 혼자이기 때문에 느끼는 충만감이랄까. 글쎄, 네가 이런 감정을 알고 엄마에게 공감해주는 날이 올까.
물론 너의 눈을 바라보며 새로운 이야기를 배우는 시간은 더할 나위 없지. 이현아, 엄마는 네 이야기를 계속 들을 거야.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때도 있겠지만, 그걸 두려워하지 않고 꼿꼿하게 기다릴 거야. 엄마 아빤 항상 준비가 돼있으니 부디 너도 겁내지 말고 우리에게 다가와 주렴 아가야.
이현아. 엄마 아빠는 네게 되도록 많은 기회를 주고 싶어. 하지만 그게 누군과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얼마나 풍족하고 폭이 넓은 기회일지는 모르겠어. 세상은 말이야. 돈이라는 것에 많이 좌지우지돼. 돈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많은 기회를 가지게 되지. 하다못해 장난감을 사는 일만 해도 그래. 네가 갖고 싶다는 것들을 많이 사주는 편이지만 앞으로 그러지 못할지도 몰라. 또 네가 갖는 장난감에 비해 다른 친구들은 그렇게 갖지 못할지도 모르지. 그게 꼭 돈만의 문제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대개의 경우, 돈은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쳐.
엄마 아빠가 선택하는 기회가 너의 인생을 결정할까 봐 사실은 많이 두렵단다. 한 가지 약속할 수 있다면, 최대한 너의 입장에서 너의 관점에서 더 많이 사려 깊게 생각할 거라는 거야.
조금 섣부르지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엄마는 네가 부당함을 느끼고 거기에 저항하고 분노하는 아이로 자라길 바라. 하지만 그 부당함의 이면에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는 것도 꼭 알아야 해.
세상에는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이현아. 그리고 엄마가 지금까지 살면서 만난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안락하게 자기 몫을 누려왔던 사람들, 보수적이고 수동적인 사람들보다 오히려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사람들 중에 더 많은 것 같아. 아마 엄마가 자라온 환경이 그랬듯 너 역시 그런 어른들 사이에서 자랄 확률이 높지. 엄마는 네가 공동체 안에서 몸소 다양성을 알고 또 가급적 폭넓은 경험을 하며 자라길 바라지만, 그 안에서 맑고 명료한 눈을 가진 예민한 개인이길 바라.
너의 시대는 엄마 같은 어른들이 살고 있는 지금과는 앞으로 아주 많이 다를 거야. 엄마는 너의 세대가 상대적으로 부유하든 아니든 잘난 척하지 않고 부끄러움이라는 덕목을 잊지 않는 세대이길 바라. 많은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리고 더 분노하고 선량함 속에 위선이 없는지 스스로 돌아보고 노력해야 해. 무엇보다 네가 겪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고 판단하지 않기를 바라.
예를 들어 할머니는 밥 먹을 때 기도를 하지. 엄마는 기도를 안 해. 언젠가 네가 그것에 대해 혼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 엄마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어. 그렇지만 지금은 안 다니지.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고, 할머니가 믿는 유일신은 그걸 허용하지 않아. 나는 거기서 오는 배타성을 어느 순간부터 납득하기 어려웠어. 그냥 그뿐이야. 정답은 없어. 특히 신앙이란 더 그렇지.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엄마는 그것이 온전히 너의 선택이길 바라. 엄마는 종교뿐 아니라 네가 자라면서 끝없이 갖게 될 의문, 호기심, 질문들을 응원할 거야. 그 안에서 해답이 아니더라도 네가 이뤄낼 수 있는 뭔가를 찾기 바라고.
다만 세상 혹은 그 밖 우주, 미지의 영역 같은 것보다 스스로의 세계를 먼저 탐구하는 사람이 됐으면 해. 세상의 중심은 결국 개인이거든. 그 개개인이 모여 관계가 되고, 집단 또는 공동체, 사회, 세상이 되는 거니까. 언제나 너를 잃지 않도록 너 자신을 가늠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길 바라. 그러니까 힘들고 가끔은 어렵더라도, 계속, 끊임없이, 고민하고 탐닉해야지. 정체성, 자존감, 존엄 같은 것들 말이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앞으로 축하하고 기념할 너의 날들은 무수히 많이 남아 있으니까. 그때마다 너에게 해줄 수 있는,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지금처럼 많겠지. 언젠가 네가 잔소리로 느낄 수 있을 만한 것들일지도 모르겠다. 내 딸, 아가, 나의 기쁨이자 햇살 이현아. 너의 만 세 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단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어. 엄마에게,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해 줘서 정말 고마워. 사랑해. 사랑한다. 정말로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