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주연 Apr 04. 2018

싸이월드가 사라져서 다행이야

영화 <레이디 버드>가 10대를 바라보는 방식

 오랜만에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접속했다. 10년전 일촌평과 사진첩은 남아 있었으나 다이어리와 방명록이 없었다(싸이월드가 서비스를 종료하면서 다이어리가 사라졌다). 사진첩 중 한 폴더에 들어갔다. 흑백 스톡 사진과 함께 오글거리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내 말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곳이 너무 답답하다. 나를 발견해주었으면 좋겠다.” 싸이월드 다이어리가 사라지길 정말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찌질하지 않았던 10대를 보낸 사람이 있을까. 10대의 나는 자의식 과잉의 끝판왕이었다. ‘난 특별해’ 병에 걸려 있던 나는 사람들이 나의 특별함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생각에(=관심을 받지 못해) 언제나 우울했다.

 영화 <레이디 버드>의 주인공 레이디버드 역시 나와 비슷한 17살을 보내고 있다. 크리스틴이란 본명 대신 스스로 지은 예명인 ‘레이디버드’로 불리길 주장하는 오프닝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저 친구도 ‘난 특별해’ 병에 걸려 있군.

 레이디 버드는 새크리맨토(처음 들어보는 도시였는데 무려 캘리포니아의 주도라 깜짝 놀랐다)라는 미 서부의 작은 도시에서 자란 고등학교 졸업반이다. 레이디버드는 지루한 소도시를 벗어나 뉴욕이나 코네티컷의 대학에 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엄마는 학비를 못 댄다며 시립대학을 가라고 일축한다.

 

 레이디버드는 자신이 속해 있는 가족, 학교, 도시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바꿔 말하자면 레이디버드는 꿈이 많은 소녀다. 멋진 이층집에 살고 싶고 학교에서 제일 인기있는 친구와 친해지고 싶고, 잘생긴 남자친구도 있었으면 좋겠고 섹스도 해보고 싶다. 그리고 욕망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긴다.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패기를 부리다가 정학당하고, 가족과 말다툼 중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가족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다. 보는 내내 한숨이 나오지만 욕할 수가 없다. 그녀의 모습은 결국 우리 모두가 경험해본, 우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나의 10대에 비하면 레이디버드는 양반이다. 지극히 한 사례로, 나의 첫 담배는 수학여행에 갔을 때였다. 소위 ‘잘 나가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노련한 척 함께 담배를 폈다.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던 ‘잘 나가는 친구들’은 빵 터지고 말았는데 내가 담배를 거꾸로 물고 필터 부분에 불을 붙이고 있었던 것(…) 그 수습 과정은 더 찌질하니까 더이상 옮기지 않겠다. 차마 이곳에 더 쓸 수 없을 정도로 10대의 기억은 곧 찌질의 역사여서, 영화를 보는 내내 더욱 괴로웠다.


 영화 <레이디 버드>의 사랑스러운 점은 주인공이 씩씩하다는 것. 아무리 엄마가 성적과 돈으로 상처를 줘도 꿋꿋이 뉴욕 대학에 원서를 쓰고, 어울리고 싶은 친구가 있으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친해지면서도 그들에게 끌려다니지도 않는다. 병약해보이고 염세적인 남자친구(심지어 밴드 기타리스트. 완전체.) 와의 첫 섹스 후 “벌써 끝났어? 섹스가 뭐 이래?” 라 말하고, 부잣집 친구들이 프롬 파티 가는 대신 집에서 술 마시며 놀자는 말에 “난 졸업식 가고 싶어. 여기서 내려줘” 라고 말할 줄 아는 씩씩하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다. 내 10대도 저랬으면 좋았을텐데,라고 까지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내가 10대에 좋아했던 남자아이들도 이렇게 허세+찌질+염세였겠지..

 이 10대 소녀의 성장 영화는 레이디 버드가 대학에 진학하며 끝이 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운전면허를 따고선 엄마에게

엄마도 처음 새크리멘토를 드라이브할 때 해질녘 다리가 이렇게 아름답다고 느꼈어?

라고 묻는다. 그토록 싫어하던 새크리멘토를 아름답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엔딩에서 주인공은 더이상 스스로를 레이디 버드라 부르지 않는다. 온몸으로 모든 처음들을 경험하면서 세상의 중심이 자기가 아니란 것을 배우게 된 것.


 이 영화는 <프란시스 하>, <우리의 20세기>에 출연했던 그레타 거윅 감독의 데뷔작이다. 감독은 레이디버드처럼 새크리멘토의 기독교학교에서 10대를 보냈다고 한다. 주인공의 이야기가 유난히 디테일하고 생생해 에세이같은 영화라 느꼈던 이유다. 하지만 반항적인 레이디버드와 달리 굉장히 모범적인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레타 거윅 감독은 각본이 막힐 때마다 종이에 “날 레이디버드로 불러줘” 라고 쓰고선 레이디버드라 불리길 원하는 이 소녀의 마음을 이해해보려했다고.


영화가 끝나고 내가 통과해온 자리를 떠올렸다. 나 역시 레이디버드처럼 대도시를 동경했으며 하고 싶은 것이 너무너무 많아서 여기저기 사고를 치고 다녔고, 가족과 학교를 싫어하는 반항적인 10대를 보냈다. 그 모든 순간들을 통과해 지금의 나에 이르렀다. 그래서 10대 소녀의 찌질함을 다루는 이 영화에 많이 공감했고 오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리고 그레타 거윅 감독처럼 나의 10대를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화해하고 싶어졌다.


+레이디버드라는 이름..너무나 중2중2해서 리뷰를 쓰면서 괴로웠다. 내 버디버디 아이디도 떠올라서 괴로웠고…

매거진의 이전글 나 왜 서울에서 살고 있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