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못난 나여서 미안합니다.
성당 동생 K와 남산에 가기로 했다.
성당 동생인 K와 나는 둘 다 극도의 낯가림 성격으로 1년 반 남짓의 시간을 반다리 정도의 거리감으로 지내오고 있었다. 덜렁대고 감성적으로 동동 떠 있는 나와는 다르게 K의 꼼꼼하고 차분한 모습이 좋아 친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친구였다. 그런데 며칠 전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K가 남산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월요일에만 쉬는 K이다 보니 친구들과 시간 시간을 맞추기는 어렵고 혼자 가기는 싫어 한 번도 못 가봤다고 했다. 내게는 마침 유급휴가가 하루 남아있었고, 혹시 나처럼 물리적 거리라든지 취향차이 등의 이유로 친구에게 먼저 뭐 하자고 말 못 하는 사람일까 싶어 말했다.
“이번 주 월요일에 나랑 가요.”
그렇게 성사된 K와 남산동행인데, 그녀를 기다리는 버스정류장에서 나의 못난 성격은 설레지 못하고 거지 같은 걱정을 내뱉고 있다. 침묵은 나의 책임이란 어쭙잖은 사명으로 살아온 것이 40여 년. 여러 가지로 지치고 몸도 맘도 병들어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한 것은 겨우 일이 년쯤 되었다. 좋아하고 친해지고 싶은 동생 K이니, 내려놓았던 것을 다시 꺼내 들어야 할 거 같은데 역시 어렵다, 편도만도 한 시간 이상 걸리는 버스 안에서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고민해 보았지만, 내게는 이야깃거리가 정말 없음이 새삼 확인될 뿐이었다. 도대체 남들은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그렇게 잘하는 걸까?
상식과 지식이 짧은 탓에 섣불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고, 기억력이 나쁜 탓에 상대방에 관한 이야기도 할 수 없고, 건망증이 심한 탓에 재밌게 보거나 들은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여도 전달 중에 꼭 단어 사고가 나곤 한다. 그 뭐지. 그게 뭔데. 꽉 막혀 생각나지 않는 단어를 전하고자 이야기의 모든 흐름은 끊겨버리고 분위기는 창백해진다. 그것을 메우기 위해 또 ‘아무 말 대잔치’, 소재는 내 흉, 가족 흉 이런 식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끝은 어김없이 이불킥이다. 이렇게 생겨먹은 사람이라, 침묵마저도 괜찮을 정도의 친한 사이가 아니면 단둘이 긴 시간을 있게 되는 상황은 우선 피하게 된다. 부족함을 보여주기 싫은 탓에 혹시 만나지 못한 아쉬움이 남더라도 후회보다는 낫다는 마음이다. 그런 나를 집에만 칩거하지 않고 최소한의 사회활동을 하게 하는 것은 거절 못하는 성격과 즉흥적 감수성이다. 이번에는 심장에서 출발해 뇌를 거치지 않고 입으로 바로 나와 버리는 나의 즉흥적 감수성이, 남산에 가고 싶다는 그녀에게 ‘그럼 이번 주에 가요’라는 말로 약속을 잡았고, 한발 늦은 나의 정체성은 뒤늦은 걱정 중인 것이다.
다행히 K는 상대적 이야기꾼이었다. 살짝 늦은 그녀는 사과와 해명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시작했고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맞장구치거나 대답하는 사이 버스는 명동역에 도착했다. 그녀를 남산돈가스집으로 이끌며 내가 먹어 본 남산돈가스 이야기로 가는 길을 메울 수 있었으나, 혹시 제일 유명한 집에 대기줄이 있으면 맛을 포기하고 대기줄 없는 집으로 가야겠다는 못난 마음으로 먹었던 것도 고백한다. 다행히 점심시간을 조금 비껴간 시간이라 그런지 대기 없이 제일 유명한 집에서 점심을 먹고 남산타워로 향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이야기는 그녀의 리드로 꽤 잘 이어졌고 덕분에 나는 큰 이불킥 없이 남산타워동행을 마칠 수 있었다.
집에 가는 길, K는 선유도공원도 가보고 싶다고 말했고 나는 조금 더 따뜻해지면 선유도공원도 함께 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이 말은 진심 아닌 진심이다. 물론 친해지고 싶던 동생과 함께한 남산타워 동행이 나도 뿌듯하고 기뻤다. 이것은 진심이다. 그런데도 도대체 나는 왜,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이기에, K와의 선유도공원 동행에도 나의 거절 못하는 성격과 즉흥적 감수성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