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같은)나의 이야기 2

남편이 아님 남편놈을 만난 이들의 푸념

by 앤바라기

"아니 자기 운전면허증이 정지되는 바람에 내가 모든 운전을 대신하게 된 거잖아. 그러면 미안해라도 해야지. 전혀 그런 게 없어. 오히려 내가 왜 미안해하냐고 되묻잖아. 이게 말이 돼?"

오랜만에 만난 K가 잘 지냈냐는 물음에 봇물 터지듯 쏟아낸 이야기는 바로 K 남편이 음주운전으로 운전면허증이 정지가 되면서, 모든 운전이 K에게 떠맡겨졌다는 얘기였다. 면허증이 정지됐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인 건 알지만, 그래도 K는 분하다고 했다. 집안일로, 아이 돌보는 일로, 아무리 바빠도 운전할 일이 생기면 K가 다녀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음주운전으로 걸린 그때는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심지어 울면서 싹싹 빌던 사람이었는데,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이 상황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남편에게 너무 분하고 화가 난다는 K 얘기를 듣고 있자니, 이번 주 글쓰기 수업 자료가 생각났다.


" K야, 이거 한 번 읽어 볼래? 여기 이 부분 "


전체글은 화자의 이모가 안락사를 선택하면서 벌어지는 내용이었지만, 내가 K에게 보여준 부분은 가족에 대한 남자와 여자의 큰 차이를 나타내는 대목이었다. 화자의 아내는 회사에서는 매우 진보적이지만 가족과 관련해서는 관계나 정을 중시하는 대단히 보수적인 성격이다. 반면 화자는 아내와 이혼한다면 그 부인의 가족은 완전 남인데, 이혼 전에 잘 지내고 가까웠던 게 뭐가 중요하냐고 아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내가 이 글을 통해 K에게 얘기해 주고 싶었던 것은 화자, 즉 남편 놈들이란 소설에서나 현실에서나 그렇게 지밖에 모르는, 우리랑은 정말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른 종족이니 열받아봤자 우리 손해라는 점이었다. 마침(!) 우리집 남편 놈도 같은 부류지만, 내 남편 놈 이야기는 워낙 많이 해서 "니네 남편만 그런 거 아니냐?"로 반박될 수 있기 때문에, 조금 더 보편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K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꿈과 환상이 가득할 수 있는 소설 속 남편 역할마저도 그런 남편 놈인 걸 보면 정말 많은 놈들이 다 그 모냥 아니겠냐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안다. '남편 놈이란 다 그런 거지'라고 해서 열받은 게 바로 식는 것도, 답답한 속이 뻥 뚫리는 것은 아니란 것을. 그래도 나만 혼자 이리 억울하고 분하고 힘든 게 아니라면 조금은 덜 외롭고 덜 서럽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위안이라도 건네고 싶었다.

물론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나오는 양관식 같은 남편도 있긴 있을 것이다. 미친 시월드에서 아내를 위해 상을 엎듯 가부장제도를 엎어버린 남편, 괴롭히는 시댁 어른들에게서 아내와 딸을 위해서 '나랑 살러 왔지. 할머니랑 살러 온 거 아니에요. 다시는 우리 애순이 볼 생각하지 말아요'라고 멋지게 집을 뛰쳐나갈 수 있는 남편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관식이에게 많은 아줌마들이 열광한 것은 단순히 박보검이어서가 아니라 박보검이 연기한 양관식이 남편계의 유니콘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한때는 왜 나만 이런 놈을 만났나 싶어 하늘을 원망할 때도 있었다. 육아는 여자가 본투비로 타고났다고 믿고 그래서 자기는 (함께 하는 게 아니라) 도와주겠다는 또는 도와주고 있지 않냐는 기본부터 잘못된 말을 잘도 내뱉고, 툭하면 울 엄마는 직장 다니시면서도 집안인도 혼자 척척 잘 해내셨는데, 왜 자기를 못 시켜서 안달이냐는 근본 없는 말을 양심 없이 해내는 놈이었다. 남편 놈에게 '소리 없는 아우성' 아니고 '욕설("그럼 엄마랑 살지, 왜 나랑 결혼해서 날 괴롭히는 거냐. 이 싹퉁머리 없는 놈아!"라고 차마 하지 못해) 없는 아우성'을 외치던 것이 도대체 몇 년이던가. 길진 않지만 (짧지도 않다) 살아보니 사람은 고쳐 쓰는 것 아니고 사람이 바뀌면 곧 죽는다던가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이혼할 거 아니면 성을 내면 무엇하리 내 기분만 더 잡쳐지는 걸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살게 된 지 오래라 K에게도 그냥 받아들일 것을 권했다. 내가 남편 놈을 만나 화병을 얻고 심지어 우울증과 무기력증으로 정신과에도 다니고 있는 중임을 알고 있는 K이니, 성내고 싸워봤자 나처럼 정신병밖에 얻는 게 없다고 얘기했다. 벽을 상대로 혼자 성내고 열받고 하다 보면 돈키호테밖에 더 되겠는가, 그 산증인이 나이고. 부족하고 쓸쓸한 위로임을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혼할 것 같지 않은 부부에게는, 내가 겪어보니, 그건 진짜 갈 곳 없는 말일뿐이다. 설령 이혼할 거 같은 부부라 할지라도 이혼은 다른 사람이 권해서 될 일도 아닐뿐더러, 그건 상대와 나의 관계를 걸고 해야 할 만큼 위험한 말임을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몸으로 드라마로 소설로 터득되어 온 것이다. 나의 부족하고 쓸쓸한 위로에 조금 더 보태 보고자, 그나마 다행인 건 K의 남편분이 눈치 없이 (술 먹으러) 나가 계시는 게 (내 경험상) 오히려 좋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바빠 죽겠는데, 눈앞에서 놀고 자빠져 있으면 그땐 더 이상 '욕 없는 아우성'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지금은 운전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차라리 눈앞에서 안 보임을 감사하며 살자 했다. 이것이 남편이 아니 남편 놈들을 만난 사람이 사는 방식이다.

작가의 이전글(거지 같은) 나의 이야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