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같은 그래서 송구한) 헌사

당신의 캐리어

by 앤바라기

당신은 정기적으로 다니는 병원 예약이 다음날 잡혀있었으므로 회사엔 병가를 내고 귀가했을 것이다. 자기 전 예약시간을 다시 한번 체크해 병원에 늦지 않을 기상시간으로 역산하여 알람을 맞춰두고 잠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알람이 울리기도 전, 늘 그렇듯, 예고 없이 들이닥친 감기몸살기를 느껴 눈이 떠졌고 잠시 고민하다 그동안 무리했던 일정들을 떠올리고는 오늘은 병원일정을 조정하고 그냥 쉬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곤 다시, 지난밤 잠이 남겨놓은 흔적인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이불처럼 까무룩 잠이 들었다. 미처 끄지 못했던 형광등이 그 역할이 필요 없어진 한낮 즈음, 새벽녘에는 아무래도 이 몸을 일으켜 다른 병을 낫기 위해 병원을 가야만 할까 싶었던 몸도, 오래간만에 길게 풀어졌던 잠으로 인해 조금쯤은 나아짐을 느꼈고 동시에 늦은 허기짐이 밀려왔을 것이다.

대충 아침 겸 점심을 챙겨 먹고 나니 그제야 지난 바빴던 일상이 가차 없이 남겨놓고야 만, 밀린 집안일들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눈 뜨자마자 나가기 바빴던 지난 날들, 야근에 야근으로 집에 들어오기 무섭게 쓰러져 자기 바빴으니 방치된 집안일 따윈 볼 새가 없었던 그날들이 어쩌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이 집에 가족은 반려견까지 넷. 잠시 당신은 매우 바빴던 그 며칠에 대해 데자뷔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 처리해야 할 것은 많고 몸은 하나임이 매우 분하게 느껴졌던 그 며칠이 왜 지금 사무실도 아닌 당신 집에서 생각나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당신이 느꼈을 감정이 분노일지 절망일지 헛헛함일지는 당신 외엔 다른 이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당신은 잠시 주변을 힘없이 둘러 봤고,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을 뿐.

두 손을 내려뜨린 채 한 참을 가만히 있던 당신이 끙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적어도 십몇 분이 지난 뒤였다. 당신은 천천히 옷을 갈아입었고, 수일 전 출장 다녀온 후 미처 풀어놓지 못했던 캐리어로 다가갔다. 그 모습은 아직 회복되지 못한 몸 때문인지 아직 망설이고 있는 생각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슬로를 걸은 듯 매우 느리게 진행이 되었다.

잠시 후 '철컥'소리와 함께 당신은 출장 시 동반되었던 그 캐리어와 함께 현관 뒤로 사라졌다.

집 안에는 현재 영문 모른 표정을 지우며 다시 낮잠을 청하는 반려견뿐이다.

-김영하님의 '당신의 나무'를 읽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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