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같은) 나의 이야기 16.

어차피 물은 같아

by 앤바라기

‘아무리 저렴해도 일행에 어르신이 있다면 절대 이른 시간 비행기표는 끊지 말자’라는 다짐과 함께 일본 여행의 두 번째 하루를 시작했다.

전날, 평소보다 일찍 잠에 들었지만, 전날 이른 비행시간으로 누적된 시어머니의 피곤함은 가시지 않은 듯했다. 물론 시어머니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 아주 열심히 따라오셨다. 그럼에도 일행의 여행 만족도를 시시각각 확인하고 싶은 내 욕심이 계속해서 시어머니의 피곤함을 발견했다. 시어머니의 초췌한 얼굴에서 점점 느려지는 젓가락질에서. 나는 꽤 여유 있는 일정이라고 생각하지만. 80세에 가까운 시어머니의 체감은 다른 것 같다. 입맛도 없고 소화도 잘 되지 않으신 것 같았다. 식사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 평소보다 유난히 더 음식을 가리시는 것이 혹시 아파서 피해를 줄까 봐 염려하시는 것 같았다. 죄송하고 감사한데 속상한 마음, 내 마음이지만 정리가 되지 않는다.

오늘 일정은 야마나미 하이웨이 전망대와 유후인 그리고 숙소다. 출발하는 일행의 얼굴에 담긴 피곤과 심드렁함을 보며 일정을 조정해야 하나 잠시 고민이 됐다. 야마나이 하이웨이는 나도 처음이라 어떨지 모르는 데다가 심지어 유명한 아소산도 감흥을 주지 못하지 않았나. 그렇다고 빼자니 유후인만으로는 숙소에 지나치게 일찍 도착할 확률이 높다. 어차피 산길을 차로 달리면서 즐기는 일정이고 여차하면 전망대는 빼고 드라이브만 하지란 마음으로 일단 출발했다, 날씨는 완전 봄이었다. 봄 기온과 풍경을 느끼며 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올라갈수록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는 자연의 법칙을 깨고, 봄에서 다시 겨울로 바뀌는 계절의 변주곡이 흘렀다. 심지어 전망대는 눈꽃 가득 겨울왕국이었다. 전망대에서 조용히 셀카를 찍는 시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일본 여행 최고의 순간이었다. 늘 귀찮아하던 아이도 꽤 만족스러웠는지 직접 차 창문을 내리고 바깥을 구경하고 있었다. 모두의 만족감으로 기분 좋게 유후인으로 향했다. 하지만 기세가 이어지진 못했다. 마을 자체가 볼거리인 관광마을 한가운데서 뭐 보러 왔냐고 묻는 그들을 보다 카페로 들어갔다. 일본 한 복판에서 너무 익숙한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기로 했다.

문득 20여 년 전 언니와 왔던 유후인이 떠올랐다. 유후인의 모든 가게를 구경하며 아기자기함에 감탄하고 흥분해서 조잘조잘 떠들어 댔던 여행. 카페는커녕, 쉬지 않고 부지런히 돌아다녔음에도 마지막에 들르려고 아껴뒀던 롤케이크 집은 이미 닫혀버렸었다. 야마나미 같지 않은 유후인에게 미안하고 야속한 마음이 드는 못난 나.

카페 덕분에 너무 이르지 않게 숙소에 도착했다. 오늘 숙소는 지난 후쿠오카 여행 때 동료들과 머물렀던 숙소로 내내 감탄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에 1순위로 정한 곳이었다. 뷔페로 즐기는 석식과 조식은 모두 과식을 부르는 맛이었고 바다를 보며 해와 달 그리고 별과 함께 온천을 즐길 수 있는 멋진 노천온천이 있다. 하지만 나의 시어머니는 흰밥과 미소국만 드셨고 뒤늦게 혼자 온천에 가려는 남편에게 말씀하셨다.

"늦었는데 귀찮게 온천까지 가지 말고 방에서 그냥 편히 씻지 그러니. 물은 같을 텐데."

그리고 일본 여행의 마지막 날. ‘진격의 거인’의 탄생지이자 옛 교토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히타마을과 또 다른 느낌의 온천숙소 그 어느 것도, 야마나미 하이웨이를 이기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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