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 혼란이 원래 기본값이다.
나는 아주 계획적인 사람이다. 목표를 설정하고 계힉을 차곡차곡 세워서 이루어야 마음이 편하다. 그러기 위해 가능한 한 통제 가능한 세계에서 살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1형 당뇨는 충격이었다. 이 병은 단순히 '조절하며 살아야 하는 병'이 아니었다. 저혈당 쇼크, 인슐린 펌프 고장, 예상하지 못한 컨디션 변화... 특히 순간의 오류나 실수가 목숨과 직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무서웠고 두려웠다.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 쏠렸다.
1형 당뇨 진단을 받고 퇴사를 했다. 그리고 몇 주 몇 달은 일상을 사는 게 아니라, 1형 당뇨를 관리하는 삶을 살았다. 매일 식재료를 사고 요리하고 먹고(그러면 요리하고 정리하고 먹고... 4시간 이상 그렇게 보냈던 것 같다), 1시간-2시간은 운동하고, 밥 먹고 나서마다 산책하고, 푹 자고.. 또 많은 공부를 했다. 대중서적은 물론 '당뇨병학'이라는 아주 두껍고 10만원 가량 되는 책을 사서 공부하고, 식품영양학을 공부하고, ....
물론 바쁘게 살다가 그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기는 하지만,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럴 돈도 없을 뿐더러, 하고 싶은 일들을 하지 못하니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나는 한 가지를 깊이 깨닫게 되었다. 삶은 원래부터 혼란스럽고, 통제할 수 없다는 것... 1형 당뇨와 관련해서 죽거나 합병증에 걸릴까봐 두려워했는데, 그런데 꼭 1형 당뇨와 관련이 없더라도 예상치 못한 사고, 갑작스러운 이별, 예고 없는 변화는 일어난다. 그게 나의 잘못은 아니다.
불확실성과 혼란... 그 모든 것이 원래 삶의 일부였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1형 당뇨 관리를 위한 삶이 아니라, 다시 일상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1형 당뇨 때문에 갑자기 당황하거나 혼란스러운 일이 많아졌지만(직장에서 펌프 소리가 난다든지, 동료들과 산책 중에 저혈당 위기가 된다든지, 애인에게 저혈당 알림이 갔는데 내가 연락을 안받아서 신고해서 집 앞에 112가 온다든지, 펌프 주입구가 막혀서 알림이 울린다든지, 펌프 소모품 이상으로 고혈당 300-400으로 몇 시간 있는다든지, 지하철 역에서 저혈당이 와서 손 채혈을 하고 바닥에 앉아 간식을 먹는다든지, 해외 여행지에서 연속혈당측정기가 빨리 떨어져서 연당기 없이 살아야 한다든지..) 미리 걱정하지 않고 그때 그때 대처하려고 한다.
여전히 무섭고 두렵지만ㅠㅠㅠ
이런 걸 어떻게 이겨내지?
관계나 종교 정도가 답이 될 것 같다.
꼭 어떤 신이 아니라도 나보다 더 큰 존재에게 의지하는 것,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모습 그대로 수용하고 수용받으며 행복을 느끼는 것,...
건강한 이의 몸이 잔잔한 강이라면 아픈 이의 몸은 수시로 바뀌는 바다일 때가 많다. 이른 아침에 잔잔했던 파도는 오후가 되자 갑자기 거세진다. 오후 시간을 위해 해변에 펼쳐둔 돗자리, 책, 노트 등은 모두 거센 파도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되찾으려 하면 괴로워진다. 거친 파도의 시간이 지나가기를 가만히 기다릴 뿐이다.
아픈 이후로는 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으로 산다. 얼음판은 때로 아스팔트 같이 매우 단단해서 썰매를 탈 수도 있지만, 온도가 조금만 바뀌면 금세 슬러시처럼 변한다. 단단한 줄 알고 걸음을 내딛다가 첨벙 빠지기도 한다. 얼음 위에서는 걸어야 하지만, 물속에서는 헤엄을 쳐야 한다. 물속에 있을 때는 헤엄치기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이렇듯 내 일상은 아무 때고 불현듯 멈춘다. 건강할 때는 단단한 아스팔트 위를 걷는 느낌으로 살았는데, 지금은 삶이 언제든 녹을 수 있는 얼음판 같다. 그 불안정함이 싫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조한진희 - 밀리의 서재
이 몸을 미워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할 수 있기를, 질병은 삶에 대한 배신이 아님을 잊지 않기를,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기대하거나 포기해야 하는지 구분할 수 있기를, 질병에 대한 두려움에 갇히지 않고, 건강한 몸에 압도되지 않고, 정상에 집착하지 않기를…. 아픈 몸과 사느라 지친 마음 위에 가만히 손을 포갠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조한진희 - 밀리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