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아 Mar 07. 2021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 무쓸모병

직장생활 흑역사로 털어보는 쫄보의 역사

나는야 6년차 직장인. 글 쓰는 마케터다. 여러 스타트업에서 내 몫을 해 왔고, 건실하게 포트폴리오를 쌓았고, 얼마 전엔 좋은 기회로 멋진 회사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


난 아직도 입사 제안을 받는 자리에서 “수습기간이 지나고 퇴사하는 경우가 많나요?” 따위를 물어보는 걸까. 혹시라도 내가 일을 못해서 잘리면 어떡하지, 첫 직장에 간당간당 합격한 신입처럼 이런 걸 걱정한다. 내 연차에 이따위 질문을 하는 건 나뿐일 거다. 아, 부끄럽다.


사실은 부끄러워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한 사연이 있다. 코딱지만 한 월급을 받던 사회 초년생 시절, 1년 반 동안의 이야기다.



26살에 들어간 첫 직장. 내가 소속된 신사업팀에선 도무지 유저가 늘어날 낌새가 없는 앱을 만들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은 앱에 들어가는 콘텐츠 카피라이팅.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혼자 일했다. 재밌지만 하찮은 일이었다. 카피가 좋던 나쁘던 애당초 그걸 볼 유저가 없는걸.


다른 팀 사람들은 막내인 나에게 “그 팀은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종종 물어보았다. 우리가 열심히 벌어온 돈을 투자하는 신사업인데 성과가 언제쯤 보일까 궁금하다고. 가망 없는 앱에 돈을 쓸 바에야 고생하는 우리들에게 복지로 돌려주는 게 합리적이지 않겠냐고. '우리들'에 속하지 않던 나는 돈 까먹는 팀에서 자잘한 일을 하던 죄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결국 서비스 종료가 확정되고 팀원들의 행방을 정하게 되자 대놓고 “한창 좋은 나이니까 기회가 많을 거예요” 격려인 척 나가라며 눈치를 주더라. 이를 갈며 이직을 준비했고 마침내 새 회사를 찾았다. 퇴사 의사를 밝히자 그동안 고생했다며 다음 날부터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1년 4개월을 일했는데 잡는 시늉조차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엔 정말 잘해야지, 없으면 안 될 사람이 되어야지, 마음 단단히 먹고 옮긴 두 번째 직장은 뷰티 관련 앱을 서비스하는 곳이었다. SNS 광고를 돌리는 것도, 앱 마케팅을 하는 것도 처음인 채 신입 마케터 생활을 시작했다. 광고 예산 설정하는 방법과 간단한 콘텐츠 가이드라인만 전달받고 바로 실무에 투입되었다.


착붙템, 웜톤쿨톤, 파우치 대공개. 하루에도 몇 개씩 새로운 광고를 만들었지만 아무래도 효율이 나오지 않았다. 별달리 피드백을 주지 않던 팀장의 데면데면한 태도에 서운했지만 처음엔 다들 이렇게 일하나 했다. 그렇게 1달째. 퇴근을 1시간 앞두고 대표가 부르더니만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했다. 수습기간이 끝나려면 몇 달이나 남았는데. 이유가 뭔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여러 번 물었지만 그저 죄송하다는 말뿐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내게 팀장은 딱 한 마디 했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쓸모없이 월급만 축내는 사람, 가르치기도 아까워 당장 내보내야 하는 사람으로 1년 5개월을 살았다. 애매한 경력으로 다음 직장을 찾으려니 두 달 좀 넘게 걸렸나. 그동안 월세는 어떻게 냈고 밥은 어떻게 먹고 다녔나 나도 모르겠다.



글 쓰는 마케터로 내 살길을 찾은 건 그다음 직장부터였다.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부터 내 몫을 할 수 있었다. 퍼포먼스를 관리하고 SNS 광고를 집행하는 건 여전히 못한다. 그치만 브랜딩을 고민하고 가치를 전하는 글을 쓰는 건 제법 해낼 수 있다. 동료들에게 칭찬을 받고, 함께 성과를 내는 멋진 경험들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이 좋다. 나름 잘해내고 있는 것 같다. 계속 잘하고 싶다. 하지만 그 서럽던 1년 5개월은 여전히 기억 한구석에 남아 있다.


지금도 나는 대표나 팀장이 면담을 요청하면 심장이 철렁한다. 잔뜩 쫄아들어 “제가 일을 잘 못하고 있나요?” 묻게 된다. 다들 걱정하지 말라고, 잘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게 정말일까. 내 실력을 과대평가한 게 아닐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데 까딱 잘못해서 잘리면 어떡하지. 이런 어이없는 생각을 계속한다. 이쯤 되면 병이다. 무쓸모병이라고 해 둘까. 내가 나를 후려치는 무서운 병.


자신을 의심하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계속해서 노력하면 뒤처지지 않는다. 그치만 내가 힘들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그만 하고 싶다.


내가 나를 긍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만히 흐르는 시간은 약이 되지 않았다. 늦었지만 무쓸모병 재활치료를 시작해야겠다. 내가 잘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믿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은 좀 써 보려고 한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더 잘하기 위해 무엇을 고민하고 배워나가는지. 뻔한 글, 쓸모없는 글이라는 생각은 내려놓고 일단은 쌓아 보자. 그렇게 쌓은 글이 내 마음을 녹일 수 있길,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길 바라면서. 쌓아 두었던 싸늘한 눈초리를 이제 마음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 제 글을 메일로 편하게 받고 싶으시다면? > https://bit.ly/yoonawork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