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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hwa Jan 17. 2019

뮤지컬 <랭보>

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

지난해 10월부터 2019년 1월 13일까지 대학로 TOM 1관에서 19세기 프랑스의 아름다운 시어가 노래가 되어 울려 퍼졌다. 지난 3년간의 투자 및 준비 기간을 거친 국내 창작 뮤지컬 <랭보>가 상연된 것이다. 윤희경 작가의 대본에 민찬홍 작곡가의 곡, 그리고 성종완 연출의 연출이 한 데 어우러져 박영수, 정동화, 윤소호, 에녹, 김종구, 정상윤, 이용규, 강은일 배우의 연기와 노래를 만나 무대 위에서 올라갔다.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낸 ‘바람 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와 ‘시인들의 왕’ 베를렌느, 그리고 랭보의 오랜 친구 들라에의 이야기를 랭보와 베를렌느의 시어를 통해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극은 들라에와 베를렌느가 베를렌느의 <내 마음에 빗물 내리네>를 부른 뒤 들라에가 베를렌느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프리카에 있는 랭보의 최후의 시를 찾기 위한 여정, 그리고 사이사이에 랭보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랭보의 삶을 되짚는다. 랭보는 여러 시인에게 자신의 시를 보내며 고향을 벗어나 파리로 가고자 한다. 들라에는 그런 랭보를 열심히 응원하지만, 언제나 랭보의 시는 너무 어렵다는 평만 돌아온다. 그러던 중 들라에는 랭보에게 베를렌느의 시집을 소개하고, 그의 시에 이끌린 랭보는 베를렌느에게 몇 편의 시와 편지를 보낸다. 베를렌느는 랭보의 시에 감명받아 랭보를 파리로 초대하여 함께 머물게 되고, 랭보와 베를렌느는 문우로서 깊은 관계를 쌓아나간다.


랭보와 베를렌느의 사이는 점점 깊어만 지고, 결국 둘은 부정을 의심당해 해외로 도피한다. 런던으로, 브뤼셀로 다니는 동안 베를렌느는 점점 더 랭보에게 집착하게 되고, 집착이 극에 달해버린 베를렌느를 피하고자 했던 랭보는 결국 베를렌느가 쏜 총에 손을 맞게 된다. 베를렌느는 총격 사건으로 인해 징역을 살게 되고, 랭보는 고향으로 돌아가 절필을 선언한다. 절필 선언 이후 그토록 그리던 아프리카로 가서 여생을 보낸다. 그리고 죽기 전, 그가 아프리카에서 머물렀던 집 앞 나무 밑에 최후의 시를 남기고 홀연히 죽는다. 이 모든 과거를 추억하며 시를 찾아 아프리카까지 온 베를렌느와 들라에는 랭보의 일기장을 발견한다. 노예상이었다가 낙타상이었다가 커피 분류 일을 맡아 하는 등, ‘절대 일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전의 말을 뒤엎고 일만 하다가 다리가 나빠져 죽었다는 내용이다. 랭보는 그렇게 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직업인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영원의 세계로 가버린 것이다.


뮤지컬 <랭보>는 시인 랭보의 삶을 그와 베를렌느의 아름다운 시어로 그려냈다. 이들의 시어는 대사뿐만 아니라 곡으로도 만들어져 극의 분위기를 한층 서정적으로 만든다. 게다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또한 극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무대 구성과 음향 효과도 제 몫을 톡톡히 했다. 구부러져 이어져 있지만 분리 되어있는 공간, 그리고 라이브 밴드가 직접 들려주는 생생한 음향은 말 그대로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러나 초연 뮤지컬인만큼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상징적인 무대, 뛰어난 연기력과 함께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었어야 할 조명은 그 역할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나 대본을 보면 생각할 수 있을 법한 조명 디자인이었고, 그래서 더더욱 조명은 기억에 남지 못하고 무난하게 흘러가버린다.


조명뿐만 아니라 극작 면에서도 고민이 부족했다. 오히려 극작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것이 더중요한 문제이다. 뮤지컬 <랭보>는 3년을 준비한 창작 뮤지컬이라고는 하지만, 기시감을 지울 수 없다. 대학로에서 소위 ‘팔리는’ 작품들의 전형인 것이다. 정수연 뮤지컬 평론가는 <더 뮤지컬>의 12월 14일 랭보 리뷰 기사에서 이런 작품들의 특징을 몇 가지 짚었다. 주로 남성 위주인 두세 명의 등장인물, 극의 내용은 주로 내적 고뇌이며 음악의 톤은 감정 위주이고 그래도 마무리는 희망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바로 플롯이 없다는 점을 꼽았다. <랭보>는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플롯이 없더라도 실제 사건을 보여줌으로써 이야기를 어떻게든 끌고 나간다. 플롯 없이도 극을 올릴 수 있는 것은 대학로에서 사용되는 하나의 ‘문법’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문법적으로 맞는 그런 ‘있어보이는’ 문장을 만들기 위해 <랭보>는 노력한다.


뮤지컬 <랭보> 포스터, 출처: 하나카드


그러나 작품에게 있어 ‘문법’이란 득인가 실인가. 극작가가 가장 빛날 수 있는 곳은 바로 대본이다. 가장 자신의 창조성을 빛내고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 놓을 수 있는 곳이 자신의 작품 속임에도 불구하고 ‘대학로 문법’에 따른 작품을 쓰는 건 작가가 아닌 글을 쓰는 기계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정해진 형식이 있으니 쓰기에도 편하고 성공이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금전적인 소득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작가성을 포기하고 ‘문법’을 따르겠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작가로서의 수명을 깎아 돈을 버는 일이다.


뮤지컬 <랭보>를 이야기함에 있어 영화 <토탈 이클립스>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작품 모두 랭보와 베를렌느의 인생을 다뤘다. <토탈 이클립스>에서는 뮤지컬 <랭보>에 비해 랭보와 베를렌느가 연인 관계였던 점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베를렌느를 만나기 이전의 랭보를 거의 보여주지 않는 대신, 베를렌느와 헤어진 뒤 아프리카로 떠난 랭보의 이야기를 뮤지컬 <랭보>에 비해 더 심도 있게 다룬다. 두 작품은 랭보와 베를렌느 외에 가장 비중있게 다뤄지는 인물도 다른데, 뮤지컬 <랭보>에서는 들라에가, <토탈 이클립스>에서는 마틸다가 등장한다.


<토탈 이클립스>에서 마틸다는 베를렌느의 아내로 베를렌느가 겪는 현실의 문제를 상징한다. 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본인 스스로가 현실에 속박되어 있어 베를렌느도 함께 현실에 있기를 원한다. 예술을 향한 의지는 없다. 남편이 베를렌느, 시인이기 때문에 그의 시를 읽지만 거기서 마틸다의 예술에 대한 의지는 멈춘다.


뮤지컬 <랭보>에서는 마틸다 대신 랭보의 어릴 적 친구 들라에가 등장한다. 실제로는 랭보의 편지 외에는 기록이 전무하다시피 한 사람이지만, 작가의 창의력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토탈 이클립스>의 마틸다와 다르게 <랭보>의 들라에는 훨씬 매력적인 캐릭터다. 그는 시를 이해하고 예술에 대한 의지가 있지만, 본인 스스로 현실에 속박되어 있는 존재이며 예술을 감상할 수는 있어도 직접 예술을 행하지는 못하는 인물이다. 랭보에 대한 들라에의 동경에는 우정과 시대의 천재 시인에 대한 존경, 그리고 자신은 절대 랭보의 발치에도 미칠 수 없을 것이라는 마음이 혼재해 있다. 


들라에와 이야기를 나누는 베를렌느, 뮤지컬 <랭보>, 출처: 오픈 런


작가는 들라에에게 더 많은 서사를 줄 수 있었다. 그가 랭보를 바라보는 마음, 시선, 그리고 랭보의 곁에서 랭보의 우수하고 뛰어난 시를 보지만 정작 자신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음에서 비롯되는 좌절까지. 들라에는 더 깊고 풍부한 캐릭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뮤지컬 <랭보>에서, 들라에는 그저 극을 이끌어나가기 위한 도구였에 불과했다. 베를렌느를 아프리카로 이끌고, 랭보에게 베를렌느를 소개하고,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의 갈등을 부추기기 위한 도구. <토탈 이클립스>의 마틸다마저 자신의 서사는 부족할지언정 자신의 의지를 표현해내는데 비해 뮤지컬 <랭보>의 들라에는 그저 극을 진행시키기 위해 기계 장치마냥 등장한다.


등장인물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작가의 의무이다. 등장인물은 각자의 세계를 살고, 각 인물들의 세계가 교차되는 지점을 그려낸 것이 소설이고 희곡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뮤지컬 <랭보>는 들라에의 세계에 관심이 없다. 구태여 랭보와 베를렌느 외에 등장시켜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여러 가지 업무를 맡겼으면서, 정작 들라에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시를 읽고 어떤 인생을 보내는지에 대해 무심하다. 조금만 상상력을 더해보자. 상술했듯 들라에는 랭보에게 복잡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삶에 드러났을 가능성도 크다. 직접 예술을 행하지는 못하지만 예술을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도와줄 수 있는 직업, 이를테면 출판사 직원이나 서점 주인 같은 직업을 가졌을 수 있다. 결혼은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당시의 시대상에 기대어 생각해볼 때 높은 확률로 결혼을 했을 것이다. 배우자는 적어도 자기와 비슷하게 시,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겠지. 적어도 <토탈 이클립스>의 마틸다 같은 배우자를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들라에가 아프리카로 떠난 건, 자신의 삶을 견인하던 랭보의 최후를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를렌느와 함께 아프리카로 여정을 떠난 건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자신보다 랭보를 잘 이해하고 랭보도 자기보단 베를렌느를 좋아했던 걸 알 테니 랭보 곁에 있던 자신의 자리를 베를렌느가 빼앗아갔다는, 그리고 자기보다 훨씬 그 역할을 잘 소화하고 있다는 생각에 베를렌느를 결코 좋은 시선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프리카로 떠나는 길은 둘의 갈등으로 훨씬 더 점철될 수 있었다.


이 단순한 상상으로도 떠올릴 수 있는 내용을 3년을 준비한 작가가 과연 떠올리지 못했을까? 그러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들라에의 존재가 소위 사용하기 편한 등장인물일 수는 있지만, 구상 단계에서 들라에의 이야기, 감정, 삶이 없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작가에게 들라에의 세계를 지우도록 만들었는가. 바로 대학로 문법과 투자자다. 성공하지 못하면 투자금을 날리게 되는 상황에서 어떤 투자자가 위험한 투자를 하겠는가. 그들의 선택은 안전했다. 대학로에서는 이런 뮤지컬이 잘 먹히고, 랭보라는 실존 인물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를 이용한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력은 뛰어났고 노래는 감미로웠으며 시어를 활용한 가사는 특히 아름다웠다. 무대는 아름다웠고 공연장은 좋았으며, 라이브 밴드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연주력은 뛰어났다. 그러나 결국 대학로 문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등장인물에게 서사 하나 제대로 주지 못하며 플롯이 부재해 감정만으로 2시간을 꾸역꾸역 이끌고 가야만 했던 뮤지컬 <랭보>, 모든 구성원이 들인 노력이 눈에 선하게 보임에도 작품성을 놓칠 수밖에 없었던 건 작가의 잘못인가, 연출가의 잘못인가, 아니면 투자자의 잘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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