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비 오는 3월 15일 오후 3시
이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은 오후의 시간이지만,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봄 비 다운 것이어서 하루 전체의 시간을 압축해 버리는 것 같다. 아침 눈 뜬 바로 그 시각부터 지금까지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은 채 왠지 멈춰서 있는 시간처럼 창밖의 명암도, 소리도, 풍경도 사진처럼 정지된 그림.
이 순간 느껴지는 흐름은 단지 오디오로 흐르는 잔잔한 피아노 멜로디와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개브리얼 제빈의 "섬에 있는 서점"을 읽다가 문득 들고 있는 책 냄새를 맡아보고 싶어졌다.
106쪽, 107쪽을 가르는 좁다란 계곡에 코를 묻고 한껏 숨을 들이켠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흡하는 소리.
'살아있는 시간이구나...'
세상에 나온 지 석 달쯤 되는 책에서 나는 냄새는 12월의 보졸레 누보 같이 상큼한 새것의 향기가 있다.
약간은 축축해서 수분기가 있는 듯하면서도 새 봄 볕에서 나는 새싹의 덜 익은 향기도 있다.
'섬에 있는 서점"의 어린 딸 마야에게서 나는 사랑스러운 풋내가 새싹 향기처럼 느껴지는 걸까...
마야의 모습을 거울처럼 적어놓은 까만 잉크들에게서는 검고 묵직한 브라질 세하두 커피 향이 난다.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산 비싼 커피의 향이 아니라 우리 동네 마트에서 1kg 큰 봉지로 산 산토스 원두커피의 구수함이 닮았다.
"그림은 다양한 색깔의 모자를 겹쳐 쓴 남자를 보여준다. 마야는 자신의 손을 에이제이의 손 위에 얹어 아직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게 막는다. 아이는 눈으로 그림과 글 사이를 왔다 갔다 훑는다. 돌연 '빨강'이 빨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 이름이 마야라는 것을 알게 되듯, 에이제이 피크리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되듯,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이 아일랜드 서점임을 알게 되듯."
누구에게나 이런 순간이 있다. '돌연'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한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
왠지 변함없는 공간에서 새로운 색깔이 느껴지고 늘 흐르는 시간 속에 빛의 흐름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
그 찰나를 기준으로 그전과 후는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 버린다. 그 후로는 그전을 기억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빨강'이 '빨강'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다른 '빨강'을 상상하기도 어려운 것처럼.
돌이켜 보면 내 삶에 그런 순간들이 꽤 많이 있었다. 처음 기억이 남아있는 어릴 적 그날, 학창 시절 새벽 라디오를 듣고 있던 어느 날, 당연했던 숙취에 간신히 눈을 뜨고 방의 창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햇빛의 아름다움을 느껴버린 대학시절 어느 일요일 오후, 최루탄의 폭음을 뒤로하고 시내를 뛰어가던 청춘의 어느 순간,
창틀 넘어 간호사의 두 손에 살포시 안겨있는 딸과의 첫 만남의 날...
나이테의 흔적처럼 내게도 '돌연' 나를 자라게 하는 순간들이 쌓여있었다.
그렇게 흔적들이 쌓인 내게는 어떤 냄새가 날까?
'나'라는 책의 오십몇 페이지에서 나는 향기가 궁금해졌다.
아쉽게도 나는 내 향기를 맡지 못한다. 냄새인지 향기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