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와 나를 철저하게 분리하기

회사 이름과 사람 이름 중에 어디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SI 업체에 개발자로 입사해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공대를 나왔고 기술직으로 일하고 싶었지만 당시에 시스템 엔지니어 업무는 저와 맞지 않는 옷처럼 왠지 불편했습니다.

몇 달 방황하다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습니다. 콘텐츠 분야의 일을 하는 쪽으로 이직을 결심했고 당시에 IT 매체 몇 곳에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운 좋게 잡지사 취재부에 합격해서 20대 후반부터 30대 초까지 6년 정도 전문지 취재부 기자로 일 했습니다. 저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네트워크 부문을 취재했고 주로 산업과 기술을 소개하는 기사를 썼습니다.

내가 취재하고 글을 쓴 매체는 IT와 디자인에 특화된 전문지였고 독자 대부분이 IT 업계 종사자였습니다. 파격적인 디자인과 최신 해외 트렌드를 보여주는 기획 기사가 많아서 규모가 큰 회사에서 는 부서마다 정기 구독을 했습니다.

매체가 널리 알려져서 디자인학과 졸업생이 입사하고 싶은 직장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취재를 나가면 기업의 대표, 디자이너, 개발자, 홍보담당자와 명함을 주고받았습니다. 취재부 기자들은 명함을 한 번에 두세 통씩 신청했고 계절이 바뀌기도 전에 다 썼습니다.

내가 일한 잡지사에서는 인터넷, IT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고 온라인 매체를 만들면서 새로운 몇 개의 부서를 신설했습니다. 잡지사에서 미디어 회사로 전환하면서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일환으로 명함을 새로 디자인했습니다.

미디어 회사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개인의 역량까지 돋보이게 하는 것이 명함 디자인의 콘셉트였습니다. 디자인팀에서 디자이너마다 두 개의 명함 시안을 제출하게 했습니다. 최종 시안으로 선정되면 디자이너는 상당한 액수의 상품권을 받았습니다. 디자인팀에서는 매체를 디자인할 때보다 더 열심히 명함을 디자인했습니다. 열 명이 넘는 디자이너가 제출한 시안은 스무 개가 넘었고 디자인팀에서는 자체적으로 절반 이상 탈락시키고 전체 직원 투표까지 올라온 시안은 다섯 개 정도였습니다.

명함 디자인이 대부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안마다 디자이너의 개성이 드러났습니다. 최종 후보로 올라온 시안은 모두 완성도가 높았습니다.

직원들의 투표 결과는 팀별로 극명하게 달랐습니다. 회사의 인지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광고팀, 인터넷팀, 총부팀 등 영업 및 관리 부서는 명함 가운데 회사 로고가 들어간 시안에 투표했습니다. 취재팀과 디자인팀, 미술팀처럼 회사보다 개인을 더 나타내려고 하는 부서에서는 명함 가운데 이름이 들어간 시안에 투표했습니다.

당시에 회사에서는 기사에 실명제를 적용해서 담당 기자와 책임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까지 바이라인(by-line, 잡지에 기자·작가·디자이너 등의 이름을 밝힌 줄)에 넣었습니다. 매체에 자기 이름을 넣는 부서의 직원들은 명함 가운데 자기 이름이 들어가길 원했습니다. 매체를 만드는 부서의 직원이 많아서 명함 가운데 이름이 들어간 시안으로 결정되었다. 취재를 하는 중에 기업 담당자들을 만나서 가운데 이름이 들어간 명함을 주면 “명함이 세련됐다.”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직장인들은 40대 이후의 삶이 불안하다. 나도 40세가 되던 해에 독립했다. 요즘은 기업에서 30대도 명예퇴직 신청을 받는다. 뉴스에 보도되는 걸 보면 20대, 신입 직원에게도 명예퇴직 신청을 받는다고 한다. 직장을 그만두는 나이는 점점 젊어지고 있다. 이런 사회 현상은 대기업, 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대기업에 다니던 사람이 40대에 명예퇴직을 한 뒤에 창업해서 그동안 저축한 돈을 모두 날리고 일용직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렵게 사는 모습이 TV 프로그램과 뉴스에 종종 나온다.


구직자에게는 취업한파, 직장인에게는 고용한파, 명예퇴직이라는 말이 일상이 됐다. 직장을 찾지 못한 청년들은 창업지원을 받아서 스타트업을 시작한다.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에게 창업은 남의 일은 아니다. 과거에는 직장을 그만둔 후의 인생을 오롯이 혼자만의 힘으로 설계해야 했지만 최근에는 퇴사에 대한 교육과 콘텐츠가 다양하다. 퇴사와 이직, 재취업을 사회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명함에는 회사와 직함이 표시된다. 대기업 명함이 있으면 나이가 젊어도, 실제로 능력이 없어도 대접을 받는다. 대기업에서 일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능력을 인정하는 게 사회 분위기다. 직장에서 관리자 직급으로 일할 때는 친분이 없는 거래처 담당자들이 특별한 일이 없어도 안부를 묻는다.

요즘은 SNS에서 생일, 기념일을 알려줘서 영혼 없는 축하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일 때문에 만나서 개인적으로 친해진 사람들은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계속 연락하고 지내자고 말한다.

이런 말들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일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 상투적인 인사, 접대용 멘트다.

직장인에게 대리, 과장, 부장 등의 직함은 단순히 위계만 나타내지 않는다. 명함에 적힌 직함은 경력과 경험, 능력, 연륜까지 더해서 특별한 무게를 갖는다. 대표 또는 CEO 직함은 더 특별하다. 최고의 자리를 나타내는 직함은 누군가에게는 꿈이고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노력한 시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명함에는 회사와 직함, 연락처, 이메일, SNS 등의 정보가 있다. 서비스업 종사자, 컨설턴트처럼 사람을 강조하는 명함에는 사진을 넣는다. 기업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의 명함에는 강사의 사진을 명함에 넣기도 한다.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도 명함에 자기 사진을 넣는다.


기업에서는 전사적으로 같은 디자인의 명함을 사용한다. 명함에 개인 정보만 다르고 레이아웃은 똑같다.

나는 명함을 받으면 회사 이름과 개인 중에 어디에 더 비중을 두었는지 살펴본다. 처음 만나는 사람의 명함을 받으면 뒷면도 유심히 본다.


회사 이름과 사람 이름 중에 어디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을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기업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자기 이름보다 회사 이름을 더 크게 생각한다.

이탈리아의 정치 사상가 마키아벨리는 “직함은 인간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직함을 빛나게 만든다.”라고 했다. 자기가 속한 조직이나 직함보다 자기 이름이 더 크게 느껴지도록 해야 한다. 명함의 가치는 그 명함에 적힌 이름이 결정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어느 회사의 팀장 누구가 아니라 이름만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가와키타 요시노리 지음, 김진연 옮김, 《고독연습》, (21세기북스, 2016), 68-69쪽



회사·조직보다 개인이 더 유명해져서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시대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역량을 키우는 과정이지 회사·조직을 뛰어넘는 결과가 아니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인과 명함을 주고받으면 ‘사람 ’을 기억한다. 반면,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직원과 명함을 주고받으면 만난 사람보다 ‘○○기업 담당자’를 기억한다.


비즈니스에서 명함은 개인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명함은 메타포(metaphor) 기능을 갖고 있다. 명함의 메타포 기능은 매우 강력하다. 회사에 속한 구성원의 삶까지 생각하게 만든다. 물리적으로는 회사와 이름, 직함, 연락처 정도만 표시되어 있지만 명함을 받은 사람은 소속된 회사와 하는 일을 보고 그 사람의 지나온 인생까지 마음대로 상상한다. 얼마나 큰 회사에 다니는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는지에 따라 사람을 평가한다. 문제는 명함을 받은 사람만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명함에 인쇄된 회사와 직함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마이크 모리슨 지음, 안명희 옮김, 《명함의 뒷면》, (쌤앤파커스, 2007), 33쪽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아는 회사와 직함이 전달하는 이미지가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에서 잊히게 해서는 안 된다. 명함에 새겨진 회사와 직함을 모두 지운 후에도 그 모습 그대로 기억에 남으려면 회사와 나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오랫동안 조직을 이끌어 온 경영자부터 직함이 없는 신입사원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직함과 지금까지 해온 일, 회사에서 성공했던 경험을 배제하고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되돌아봐야 한다.

직장에서 어떤 직함으로 불리는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지, 어떤 일을 해왔는지에 따라 한 사람의 능력을 규정한다면 개인의 능력은 너무 초라해진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나’도 사라진다. 일에만 매달려서 바쁘게만 살면 그 끝은 어디일까? 직장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에만 몰두하면 자신의 진짜 삶과 능력은 뒤로 밀린다.

회사와 나를 철저하게 분리하고 자기 이름만 놓고 생각했을 때 3년 후, 5년 후에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정경수 지음, 《혼자의 기술》, (큰그림, 2018), 88~93쪽


참고문헌

가와키타 요시노리 지음, 김진연 옮김, 《고독연습》, (21세기북스, 2016), 68-69쪽

마이크 모리슨 지음, 안명희 옮김, 《명함의 뒷면》, (쌤앤파커스, 2007),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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