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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Dec 18. 2019

거짓말 잘하는 것도 능력이다

휴직일기(9) 가기 싫은 자리에 가야만 했던 날



요즘 좀 살만했다

쉬자마자 이런 편안함이 찾아오다니 내가 꾀병을 부린 건가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냥 회사라는 고통의 근원에서 멀어서 그런 거였다

출퇴근과 업무라는 기본적인 마이너스가 사라져서 힘들고 우울한 날도 나름 결과값은 나름 플러스가 된 거였다




오늘은 회사에서 겪은 스트레스(특히 미움과 분노)가 강하게 상기된 날이었

원치 않 자리에 불려가서 원치 않 만남을 했기 때문이다


딱히 회사를 떠나있는 내가 꼭 필요한 자리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 정해져있던 내 스케줄을 이유로 가지 못하겠다고 했다

사실 가면 스트레스를 받을 게 뻔했기 때문에 가기 싫어서 완곡하게 거절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사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뒤늦게라도 그 자리에 참석하기로 되었다


밤늦게 약속장소에 가서 표정이 굳은 채로 앉아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참석자들에게는 미안했지만 내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고 딱히 노력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 가야한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회사 다닐 때 같은 스트레스를 느꼈고 그 사실이 너무 화가 나서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나중에 후회할 것이 뻔했지만 그렇게라도 당장의 불행을 덜어내고 싶었다



친구에게 이 사실을 말하니 연락을 아예 끊어버리지 그랬냐고 했다

그리곤 자기 같으면 그냥 개인 일정이 아니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내서 가고 싶어도 절대 못 가는 거라고 받아들이게 했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내가 참 바보 같았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 할 걸 그랬다

그냥 거짓말을 해버릴 걸 그랬다


거짓말은 나쁜 거라는 가르침을 어려서부터 세뇌당하듯 받아서 내 인생에 거짓말이라는 옵션이 올라온 적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 그런 거짓말을 칠 생각도 못하고 사실을 그대로 말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데 거짓말을 안 했으면 뭐 하나

굳이 그 자리에 가서 자리 자체를 불편하게 만들어 버렸는걸

그래서 거짓말을 한 거나 매한가지로 상대방에게 몹쓸짓을 해버렸는 걸

몸도 마음도 피곤하고 분노와 미안함이 뒤섞여 머리도 복잡하다

오늘 그 자리에 가서 좋았던 건 단 한 가지도 없다

차라리 거짓말을 잘 꾸며냈다면 이것보단 나았을 텐데



거절의 이유로 진실을 말했다는 사실은 참작되지 않는다

나를 그 자리에 강제로 오게 할 힘을 가진 사람에겐 그런 건 다 필요 없다

거짓말을 잘하는 것도 능력이란 이상한 생각을 오늘 뼈저리게 했다

거짓이 거짓을 낳는다고 했는데, 거짓이 평온을 낳을 때도 있겠구나 싶다


"가기 싫은데요"라고 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어도 못 가는데요"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낫겠다

어설프게 착한 척을 하는 착하지 못한 나는 그냥 못된 애가 되는 편이 낫겠다





이런 바보 같은 내 모습을 얘기하며 하루를 마무리해야 하다니

찝찝한 밤이다


오늘 처음 춘 춤이 참 좋아서 그 이야길 쓰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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