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무 싫은 날은 어김없이 또 찾아와

이생망의 심리

“이번 생은 망했어. 희망이 보이질 않아.”자주 듣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주 들리는 말을 잘 들어보면 그 시대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90년대에는 'Boys be ambitious!' 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청춘은 뜨거운 시기여야하며, 목적지향적인 것이 당연해 보이던 시절. 과연 그 때는 괜찮았을까? 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들의 마음은 지금 괜찮을까 궁금하다.


사실 'Boys be ambitious!'라는 말은 상당히 차별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남녀 차별

남자라면 야망을 가지라는 말을 상당히 차별적이다. 왜 여기서도 남자 여자를 가른단 말인가. 관용적으로 he, boy, 그를 지칭하는 것 자체가 이미 남성 우월주의를 내포한다.


둘째, 나이 차별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며 또 다른 의미에서 차별을 만들어 낸다. 아이들은 야망을 가져야 하고 나이든 사람은 야망을 가질 필요가 없는 건 아닌데 말이다.


셋째, 야망 있음과 없음 간의 차별

유전적으로 야망이 없게 타고난 기질도 많다. 야망 낮은 기질이 야망을 가져라!는 말을 들으면 좌절할 수밖에 없다. 없는 야망도 쥐어짜서 만들어야 정상인 취급을 받는 것. 태어나서 처음 만난 세상이 나에게 폭력적인 메시지를 던진다면, 아무리 낙천적이고 둔한 기질로 태어난 아이라도 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지기는 어렵다. 어떻게 누구나 반드시 야망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Boys be ambitious!'라는 말은 남들이 우러러보는 모습으로 성공해야한다는, 입신양명이 아니면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부족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타고난 자기의 적성과 행복과 즐거움에 맞게 사는 삶이 아닌, 우리가 그토록 외치는나다운 삶이 아닌, 사회가 정한 성공에 맞춘 삶을 살라는 강요다.


2020년 현재는 좀 달라졌을까. 2020년 4월을 뜨겁게 달궜던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는 입신양명의 대명사 5인방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모두 서울대 의대 출신 대학병원 의사이며, 수려한 외모, 잘 나가는 친구들, 멋진 취미생활까지 보유한 일, 관계, 삶 모두 완벽하게 챙기는 캐릭터! 심지어 5인방 중에는 재벌 아들도 등장한다.


특히 판타지 캐릭터, 이익준(조정석)은 입신양명한 사람이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며, 아들까지 잘 챙긴다. 이혼(아내의 외도로 인한)의 스트레스까지 금방 극복해 내버리는 강철멘탈까지 소유했다. 2020년에도 여전히 학벌주의가 판을 친다. 다행히 이혼은 흠이 아니라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중이라는 사실 외에는 여전히 서울대, 의사가 최고인 세상이다.


2010년대 후반부터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이번 생은 망했어요(aka 이생망)’라는 말은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이런 말을 농담처럼 할 수밖에 없는,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마음은 슬픈 그 사람에게 필요한 건 그저 누군가의 토닥거림이 아닐 것이다. 실질적인 책임이 동반되는 위로가 아니라면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낫다.


‘이생망’이 내포한 심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할 수 있다.


1. 일단 ‘이생망’은 말이 된다. 입신양명을 못한 나는 이 사회에서 진짜 망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2. 입신양명을 하지 못한 나를, 입신양명해야 하는 나와 비교하면 망한 것이 맞다.

3. 우리는 아직도 90년대 프레임 안에 살고 있다.


‘이생망’이라는 말은 90년대의 'Boys be ambitious!'의 연장선이이며 결과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때랑 지금이랑 똑같다. 껍데기만 달라졌을 뿐. 인간은 자기 맘대로 살 권리가 있는데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사회가 정한 기준에 따라 인정받고 출세해서 이름을 날리지도 못했다면? 좌절은 당연한 결과다.



가끔 나도 싫지만, 너도 싫고 세상도 싫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나는 없애고 싶어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듣는다. 내 안에 존재하는 나의 일부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들이다. 잘 하는 나, 멋진 나만 인정하고 싶은 마음, 내가 그려놓은 모습에서 벗어나는 나는 세상 밖에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렇게 내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줄어든다.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 내가 나의 눈치를 보는 내가 되어간다. 그렇게 나는 쭈그러든 자율성을 갖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한 채 나에 대한 불만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이런 마음도 많이 있다. “저 사람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나랑 다른 누군가를 보면 화부터 나는 마음이다.


“저러면 안 되지!”“저건 틀린 거지!”


그렇게 판단한다. 그리고 내가 맞다는 걸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수집한다. 그 사람과의 소통보다는 내가 나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근거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랑 다른 타인과 소통하지 않는 채 이 세상을 살다보면 나는 점점 외로워진다. 사람을 못 믿겠는 마음은 커져간다. 타인과 마음을 터놓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고 어른이 된 개인은, 외롭지만 그 외로움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도 알지 못한 채 타인을 경계하며, 나를 감추며 이 세상을 살아간다.


C.R.Cloninger 연구진은 성격과 기질을 알아보는 도구인 TCI(The Temperament and Character Inventory)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인간 성격의 성숙도를 “자율성+연대감”으로 설명하였다. 자율성(Self-directedness)은 자기와 자기의 관계를 의미하며, 자율성이 높은 개인은 자신을 ‘자율적 개인’으로 지각한다. 자율성이란 개인의 행동을 상황에 맞게 조절하기 위하여 조절하고 적응시키는 능력을 의미한다. 자율성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후천적으로 높일 수 있다. 내가 싫은 마음은 낮은 자율성을 시사한다. 연대감(Cooperativeness)은 자기와 타인과의 관계를 의미하며, 연대감이 높은 개인은 자신을 인류의 통합적 한 부분으로 지각한다. 연대감이란 나와 다른 타인을 수용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연대감 또한 자율성과 마찬가지로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싫은 마음은 낮은 연대감을 시사한다.


불안 속에서도 성격의 성숙도를 높인다면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가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나의 불안을 껴안은 채 나도 싫고, 사람들도 싫고, 세상까지 싫은 마음을 내면에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나도 싫고, 타인도 싫은 마음을 갖고 살아갈 때, 이 세상이 친절하게 느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막막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당연한 결과다. 심리학에서 인간을 설명하는 대표 이론인 자기결정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능동적이고 성장지향적인 유기체이다. 인간은 스스로 흥미를 느끼는 활동을 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체험하며 살아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


또한,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닌 집단과 연결된 형태의 삶을 통해 온전한 인간으로 통합되어가는 존재라고 보았다. 인간은 혼자살 수 없고, 환경과의 조화를 통해 성장하려는 기본 욕구를 갖고 태어난다고 본다. 이렇게 인간의 근원적 특성인 자기와의 관계(자율성),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연대감)가 끊어진 채로 살아가고 있다면,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본질에서 멀어진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삶이 어떻게 따뜻하거나 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글: Chloe Lee

그림: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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