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맞추는 나에 익숙해진 나

쓸데없는 눈물은 없다.

“어른이 되면 안 울 줄 알았어요.”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어른이 되어 우는 게 마치 부끄러운 일처럼 느껴지는 마음들이 많다. 울음을 애써 참다보면 우는 법도 잊어버린다. 그렇지만 인간은 꼭 친밀한 누군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만 상실감을 느끼는 건 아니다. 사실 우리 일상에서는 은근히 많은 상실감이 존재한다. 더 살아봐야 알겠지만, 어른이 되어도 눈물이 날만한 일은 많이 생기는 게 당연한 것, 그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각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을 때. 친구들을 만나도 왠지 쓸데없는 얘기인 것 같을 때. 세상 돌아가는 일이 나랑은 상관없는 것 같을 때. 뭔가 내가 동떨어진 인간 같을 때. 집으로 돌아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내 마음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상실감의 방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상실감이라는 ‘감정’은 내가 나를 맘에 안 들어 할 때 자주 느껴진다. 내가 만들어놓은, 혹은 특히 내가 잘 보이고 싶은, 내가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 정해놓은 이상적 모습에 닿지 못하는 나의 찌질한 모습을 없애고 싶을 때. 그런 모습을 들킬까봐 무서울 때 나는 쭈그리가 되는 동시에 마음 한 켠은 공허하다. 도대체 이런 감정을 어찌해야 하는 걸까.


타인의 승인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채 살아오게 되면, 사랑을 할 때도 상대방에게 맞추는 형태의 내가 발동한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모습, 바라는 모습만 보여줘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의 눈치를 보며 한없이 맞추는 나로 변해간다. 그러다 내가 바라는 사랑이 오지 않으면 좌절하고, 점점 나는 원래의 나를 잃어간다.


나는 그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나를 지워야하는 건 아니다.

심지어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포장한 나는 진짜 나도 아니다.


그렇게 인위적인 나를 만들어 찰나의 사랑을 얻는다 해도 진짜 나는 무의식 속에서 울 수밖에 없다. 애초에 조건적인 사랑으로 시작해서 조건적인 사랑만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라면 어차피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사랑도 아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자체를 통째로 사랑받는 것이니까.


내가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이란 걸 그가 알면 나를 떠나지 않을까 무서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냥 나는 또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며 자책한다. 상대방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상대방의 기분이 나쁜 것은 내가 문제이고 내가 원인이기 때문에 내가 해결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 사람의 감정이 오롯이 나의 책임일까? 나는 왜 그 사람에게 맞춰야하는가? 그 사람의 감정은 그 사람의 것이고, 나는 그냥 나일뿐인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을 원하는 건 그 사람의 욕구이지, 내가 나를 버리면서까지 그 사람의 이상에 맞춰야하는 건 아니다. 내가 사랑받고 싶은 욕구 자체를 표현하지도 못한 채, 상대방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나를 숨기면서 연애를 지속한다면 그게 진짜 관계인 지 멈춰서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런 관계 지켜서 뭣에 쓴단 말인가. 결국 난 사람에게 나로서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건데. (지금껏 나도 모르게 정답이라고 생각해왔던) ‘무조건적으로 그에게 맞춰주기 전략’은 틀렸다. 그렇다면 그 전략은 당장 그만두는 게 맞지 않을까.


어차피 내가 그 사람에게 맞추려고 노력한다 해서 그 사람의 이상(ideal)에 닿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사실 애초에 그 이상에 닿을 필요도 없다. 그래서 그 노력은 오히려 나의 영혼을 갉아먹는 행위이다. 지금 내가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하느라 나를 지우고 있다면, 지금 당장 멈추길 바란다. 어차피 그 전략은 내가 원하는 사랑을 만드는 데 도움이 안 된다.


그렇게 나의 일부가 나의 영혼을 갉아먹도록 그냥 두고 있다면, 비판의 목소리가 나의 존재 전체를 조종하고 있다면 나는 괜찮을 수가 없다. 그런데 밖에서 보여지는 나는 웃고 있다. 밝은 척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내 속마음을 가린다. 사실은 하나도 안 괜찮지만 괜찮아야 해! 별 일 아니야. 그러면서 나를 억누른다. 그런데 말이다. 눈물이 난다면 눈물이 날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울 일이 아닌데 괜히 쓸데없이 눈물이 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내 마음에 흐르는 눈물을 있는 그대로 읽어보면 좋겠다. 눈물이 올라오는 게 느껴진다면 그냥 그대로 마음껏 흘려보면 좋겠다. 그 눈물 내가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그냥 그 눈물이 흐르는 대로 놔뒀으면 좋겠다. 우는 나를 내가 또 잘못했다고 혼내지 말고. 어른이 되어도 울지 않는 게 아니니까. 울 일은 더 생기는 게 어른의 삶인 것 같아서. 세상에 쓸데없는 눈물은 없는 것 같아서.



<동일시(identification) 이론>


동일시(同一視)는 중요한 타인(significant other)의 태도, 가치관, 행동 등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가는 과정을 말한다. 생애 초기 가치관 형성에 주로 영향을 미치는 전형적인 중요한 타인으로 부모, 교사 등을 들 수 있다. 동일시(identification)의 결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의 행동과 말투, 사고방식과 닮게 된다. 즉, 주입된 메시지는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이 된다.


“일찍 일어나야지” 엄마의 목소리는 나의 정체성이 되어 “아직까지 자고 있는 나, 너무 한심해”와 같은 생각을 스스로 생산해 낸다.


Boys be ambitious! → 응 그건 니 생각이구나. 내 생각은 따로있어.

동일시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자동적으로‘이번 생은 망했어’와 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Boys be ambitious! → 진짜 그래야 할 것 같은데...(동일시 프로세스)

→ 못 그러고 있는 이번생은 망했다


‘이생망’은 ‘Boys be ambitious!’의 프레임을 벗어던진 생각이 아니라, 오히려 ‘Boys be ambitious!’의 프레임을 자신의 정체성(identity)으로 받아들인 결과물이다.



글: Chloe Lee

그림: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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