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자유란 어떤 모양일까
“괜찮다”라는 위안이 필요할 때가 있다. 요즘도 “괜찮아”라는 말이 참 많이 들린다. 우리는 때로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마음, 괜찮은 걸 거야’, ‘큰 문제 아닐 거야’라고 나를 다독인다. 그렇게 나에게 주문처럼 ‘괜찮아’, ‘이 순간만 지나가면 다 괜찮을 거야’라고 나를 진정시키려한다. 설령 울고 싶더라도 마음 놓고 울지도 않는다. 이 세상에 수많은 “괜찮아”도 그런 우리의 마음을 대신 말해주고 있는지 모른다.
지금 이 상황이 “괜찮다”는 확신이 외부에서 있어줘야 내가 진정으로 괜찮은 것 같다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기에 “괜찮아”라는 진정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사실은 그 상황에서 나는 괜찮지 않다. “괜찮지 않은 것은 큰 일 난 것”이라는 내 안의 두려움이 그 “괜찮지 않음”을 마주보도록 허용하질 않을 뿐이다.
나는 언제나 괜찮아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언제나 괜찮고 싶다. 사실 괜찮지 않음을 바라보는 건 두렵고 싫다. 괜찮지 않은 상태는 매우 불편하다. 불편함을 바라보는 건 해본 적도 별로 없다. 웬만하면 피하고 싶다. 그렇게 우리 안에 “회피” 반응은 자연스럽게 습관으로 쌓여간다. 그렇게 불편한 일이 있으면 회피하는 방식으로 이 세상의 스트레스에 대처해나간다. 그러한 대처방식이 나의 패턴으로 굳어간다.
문제는 그대로 둔 채, 회피했던 기억들만 쌓여간다. 그렇게 불편한 상태에 정식으로 맞서 싸워본 적이 없는 나를 보며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말한다.
“너는 비겁해”
“너는 쫄보야”
“너는 못났어”
내가 왜 그렇게 회피할 수밖에 없었던 지를 공감하는 자기(self)의 힘이 너무나 미약한 나머지, 나를 꾸짖는 자기(self)는 내 안의 주인처럼 확신에 넘쳐있다. 언제나 가장 먼저 튀어나오고, 목소리도 가장 크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이 항상 옳단다. 그래서 나를 언제나 꾸짖을 준비가 되어있고, 나는 꾸짖음을 당한다.
그런 자기에게 필요한 건 그저 괜찮다고 그 순간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괜찮지 않음을 보자고 선택하는 자기의 힘을 키우는 것이다. 꾸짖는 자기에게 늘 패해왔던, 내 안의 나를 ‘공감하는 자기’의 목소리를 키워줘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이제는 내가 나를 공감해도 될 차례다. 꾸짖음은 수없이 들었지 않는가? 앞으로도 그 꾸짖는 자기에게 패하고 살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사실 나는 정말로 괜찮고 싶은 것 아닌가.
“먹고 자고 섹스하는 건 인간의 본능인데..그 동안 인간의 기본 욕구를 너무 억누르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제 그럼 안 될 것 같다는 걸 알겠어요. 이젠 먹고 싶다는 본능, 자고 싶다는 본능, 섹스하고 싶은 본능을 나쁘다하지 않을래요. 그게 왜 나쁘다고 생각했을까요? 정말 기본적인 건데..”
본능을 너무 누르고 살아왔던 클라이언트가 어느새 이런 말을 했다. 생존에 필요한 인간의 기본욕구, 본능에 귀 기울여도 되는 삶을 인식하기 시작한 그녀의 통찰이 앞으로 자기를 자유롭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에. 이제 그녀는 자신의 본능에게도 귀 기울이기로 선택했다. 그 본능이 지워버리거나 나쁘다고 수치스러워할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녀는 점점 더 자유로워지는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프로이트의 성격 이론]
프로이트는 성격의 구성 요소로 ego, superego, id를 제시했다. superego는 바람직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그 사회의 질서체계인 가치, 도덕, 윤리를 내면화 한 것을 의미한다. id는 성격의 가장 원초적이며 본능적인 부분을 의미한다. ego는 행동을 통제하며 반응할 환경의 특징을 선택하고 어떤 본능을 어떤 방법으로 만족시킬 것인지 결정하는 중간자 기능을 한다.
superego가 너무 강해지면 ego는 중간자로서 행동을 통제할 힘을 상실한다. superego가 ego를 장악했다면 세상은 must/should 투성이가 된다. 인생 전반에 걸쳐 해야 하는 것, 지켜야 하는 것, 의무 밖에 안 남는다. 그런데 어떻게 괜찮게 살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id가 세상에 그대로 드러날 수는 없다. ego는 id의 욕구를 사회적 통념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하는데, superego에 짓눌린 쪼그라든 ego는 중간자 역할을 못한다. 그렇다고 id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ego가 제 역할을 하려면 자아의 힘, 즉 자아강도(ego strength)가 강해질 필요가 있다. 즉, ego가 제 역할을 하려면 superego의 압제로부터 벗어나야 된다. 그녀의 대사는 자아강도(ego strength)가 강해지고 있는 증거다.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ego에게 자유를 주자.
혹, ‘내가 너무 막 가면 어쩌지?’라는 생각으로 불안해 질 수 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행동이기 때문에 내가 나를 못 믿는 마음이 따라오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새로움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불확실한 것에 불안함을 느끼는 기질로 태어났으면 더욱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걱정을 좀 내려놓아도 되는 근거가 있다.
20년 간 본능을 누르는 게 기본값이 되었다면, 어차피 ‘너무 막 가지 않을까?’ 걱정 안 해도 되는 이유가 내 안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지금까지 20년 이상 나를 평가하고 꾸짖는 내가 내 안에 너무도 강하게 살아 있다. 그 목소리가 나로 하여금 본능대로 막 가려고 해도 막 가도록 그냥 두질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젠 그 목소리랑 싸울 힘을 집중해서 키워도 모자를 판이다.
이젠 좀 나의 욕구, 본능적인 나의 욕구에도 귀를 기울이며, 나의 자아가 ID를 조절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좋겠다. 내 욕구에 충실한 삶을 살아보는 것이다. 나는 이미 지금껏 이 사회에서 생존해오면서 배운 도덕적 가치관, 그리고 내가 스스로 정한 도덕적 가치를 탑재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나의 본능을 좀 챙기는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진정한 자유란 그렇게 달리는 나를 꾸짖거나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달리다 지칠 땐 쉴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절하게 달콤한 자기효능감을 느끼면서 때로는 너무 달리느라 무리한 나에게 포근한 쉼을 줄 수 있는 나로 사는 것. 그것이 자유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자유는 인간의 기본욕구이지만, 우선순위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자유가 최고로 중요한 가치인 사람들이 있고, 자유는 중요하지만 후순위인 사람들이 있다. 각자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의 자유를 자기에게 찾아줄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해 볼 것이 있는데 ‘난 자유로운 영혼이야 상관 마 개썅마이웨이’라는 말이다.
자신의 자유로움으로 인한 파장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나 혼자 산다’라면 상관이 없다. 기안84처럼 살아도 그 누가 뭐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렇게 자유롭게 살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조직 안에 있을 때, 가족구성원으로 있을 때 발생한다. ‘나는 이렇게 생겼어, 터치하지마!’라는 무대뽀적인 자유분방함은 혼자 있을 때 최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땐 문제가 달라진다.
조직에서 구성원으로 소속되어 있을 땐 어떻게 자유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참 어려운 문제다. 사실 기질적으로 타고난 ‘자유분방함’이 높다면, 규율이 엄격한 조직문화에서 적응하고 버텨내기가 매우 힘들다. 요즘은 프리랜서, 프리워커, 1인기업 등 독립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렇게 일하는 모양이 맞는 사람들은 자유분방한 기질을 타고났을 가능성이 높다.
가족구성원으로 소속되어 있을 때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솔직하게 내가 원하는 자유의 모양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는 것이다. 단 한 번의 대화로 나의 자유를 확보하긴 어렵다. 내가 원하는 자유에 대해 소통하고 싶다면, 지속적으로 세밀하게 대화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결혼을 한다면 부부간의 솔직한 대화는 필수다. 타인이 나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느끼는 순간, 그 관계에는 금이 간다. 구멍이 생긴다. 나의 자유도, 그의 자유도 충분히 보장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소통은 필수다.
자유를 누리려면, 내가 원하는 자유의 모양이 무엇인지부터 내가 잘 알아야 한다. 내가 정확히 알아야 그것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능하면 최대한 구체적인 모양으로 생각해본다. 누군가에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화된 모양.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때, 자신의 결정을 존중받을 때 자유롭다고 느낀다. 나는 어느 정도의 자유가 편안한 지, 자유에 대한 자기감각을 찾아가면 좋겠다.
모든 인간이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분방함’이 기질적으로 낮게 태어난 사람들은 ‘질서정연’한 상태에서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조직 내에 규율이 있는 상황에서 더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오히려 규칙이 없을 때 더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자유를 원하는 정도, 그 모양은 다 다르다. 나에게 필요한 자유의 모양은 무엇인가 틈틈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남이 사는 모양 말고, 내가 살 나의 삶이기 때문에.
little reflection
내가 원하는 자유로운 삶의 모양은 어떤 모습인가요?
- 일터에서 내가 원하는 자유:
- 사랑하는 관계에서 내가 원하는 자유:
- 휴식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자유:
그림: Pixabay, Enrique Mesequ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