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사람 컴플렉스 탈출 대작전(feat. 비생산적인 자기연민에 대한 고찰
“제가 지금껏 얼마나 희생하고 다 맞춰줬는데. 고맙단 소리는커녕 오히려 무시만하는 것 같아요. 더 이상은 못 하겠어요. 왜 저는 늘 이렇게 배려하고 져줘야하는 거죠? 이제는 저 자신만을 위해서 살고싶어요. 그동안 저 걔네들 비위 맞춰주느라 정말 힘들었거든요. 그렇게 착하게 산다고 그 누구 하나 저를 위해주거나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정말 허무해요.”
또래집단에서 늘 양보하고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던 J는 이제 누군가의 뒤치다꺼리를 맡는 일을 그만하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그런데 여기서 너무 착하게 사느라 자신을 챙기지 못해서 관계에서 힘들었으니 이제는 타인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나 자신을 챙기며 행복하게 살면 모든 것이 해결될까? 자꾸 착하게 살았으니 이제부터 자신을 토닥토닥 하라는데 이미 자기연민에 빠져 나오지 못한 채 계속해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메시지를 본다면 어김없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 우려가 된다.
그래 나는 너무 맞추고 살았지
그동안 너무 눈치보고 피해보고 살았어.
이제 내가 행복한 삶을 살거야!
이렇게 생각한다고 진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지 않고 현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면 정말로 관계에서 편안해질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심각하게 든다.
앞서 소개한 J는 앞으로도 평생 동안 또래 관계에서 자신이 ‘왜’ 어렵고 귀찮은 일을 떠맡으며 고맙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 지 영영 알지 못한 채, 만만이로 살게 된 자신에 대해 모르는 채, 그런 갈등 상황 속 타인들을 원망만 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런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면서. ‘착하게 살지 않아도 괜찮아. 토닥토닥. 이제 너만을 위해서 살아‘ 라는 메세지는 자신을 피해자라고 여기는 사람이 갈등관계에서 자신이 기여한 바를 끝까지 모르는 채, 자신이 가해자라고 인식하는 사람에게 책임을 모두 전가하도록 하나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J도 피해본 부분이 있다. 그동안 혼자 참고 상처받은 부분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관계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니 자기연민의 정당화는 그만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키자, 적당한 거리를 지키자,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면서 대처하자’ 등등 방어적인 태도를 강화하는 접근만을 사용한다면 관계능력은 점점 한 쪽으로 굳어진다. 진정한 관계를 맺는 쪽이 아니라, 관계를 안 하며 살아가는 쪽으로. 아무 관계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그 편이 안전하게 느껴지는 일시적인 효과를 평생 유지하며 사는 게 과연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행복일까? 우리 마음속에는 타인과의 친밀감을 원하는 욕구가 없어질 수 있을까? 애초에 사회적민감성이 높은 유전자를 타고난 기질의 사람일수록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더 많이 받고 살아왔을 텐데, 기질은 바뀌지 않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에 대한 의존성 욕구는 영원히 좌절된 채 살아가야한다는 말이다. 착하게 살아서 상처받았다는 건 근본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덜 착하게 살자는 것 또한 근본적인 솔루션이 될 수 없다.
아프더라도 부딪히고, 더럽더라도 흙탕물에서 뒹구르며 갈등에 맞서는 방식으로의 대처를 해보는 것, 그것이 성인이 해볼 만한 도전이 아닐까. 우린 더 이상 엄마아빠가 오구오구 예뻐라 너가 우주 최고다 띄워주기만을 바라는 어린 아이가 아니다. 이젠 누군가가 우쭈쭈 해주는 것을 바라고 가만있을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줄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런 나를 믿고 맡겨보는 것이 내가 지금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연습이 아닐까. 그저 더 이상은 안 다치기 위해, 덜 상처받기 위해 나를 보호하며 방어하는 연습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싫지만 맞춰주고 살다, 배려하고 살다 무시만 당하고 말았던 만만이라면 자신이 불쌍해진다. 그러다가 또 그런 역할을 반복하는 만만이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타인은 내가 어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이 때 진짜로 나에게 필요한 건 타인만 원망하는 것도 아니며, 자신만 탓하는 것도 아니다. 관계에서 왜 자신이 착한 역할만 선택해왔는 지? 그 마음에 대해 성찰해보는 작업을 시작해보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자책이나 내가 불쌍한 마음으로 빠지는 것 또한 회피의 일종이라서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착한 역할 말고도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있다.
다른 옵션은 시도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시도는 두려움을 수반하기 때문에 착하지 않기 옵션(예를 들어, 싸우기, 대들기, 자기의견 강력히 주장하기, 거절하기 등)을 선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한 선택을 했을 경우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거나 떠나가서 혼자가 될 리스크를 떠올릴 수도 있다.
내가 나를 불쌍하다고 결론지으면 타인은 적이 된다. 이러한 시각은 자기 자신을 있는그대로 통합적으로 인지할 기회를 막는 것이라, 자기연민이 필요한 순간 스스로를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봐주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지만, ‘자기연민의 프레임’으로만 자신을 바라보고 갇혀있는 것 또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고싶은 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나, 내가 모르는 무의식 속의 나 까지 꺼내어 볼 수 있는 것이 통합적인 나를 찾아가는 것이다. 글과 말을 통해 나도 모르던 나를 꺼내어 있는 그대로의 나의 조각들을 찾아서 통합하는 과정이 성숙의 과정이라고 본다.
착한 사람 역할을 많이 써온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불쌍하고 힘든 측면에만 몰두하여 부분적인 자기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자기를 볼 수 있도록, 더 이상 불쌍한 자기모드를 반복하지 않도록, 다른 자기를 꺼내어 사용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행동을 시도해볼 용기를 모으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기연민 기능은 꼭 필요한 순간에만 ON 시킬 수 있는 조절기능을 탑재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전체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객관화 작업을 함께할 때 나는 비로소 나로서 살아간다고 느낀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그런 삶이 아닐까. 내가 그토록 바라는 나답게 사는 삶, 싫을 때 싫다고 말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삶이 아닐까. 그렇다면 예전과는 다른 선택을 해보길 바란다. 이제는 그럴 힘이 있다는 걸 꼭 한번쯤은 확인 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