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감을 후천적으로 획득하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아침에 출근준비를 하는데 남편의 잠꼬대가 들렸습니다. 잠꼬대를 노래로 하는 건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장면입니다.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명랑한 노래를 부르는 남편을 보면서 순간 너무 귀엽다는 생각, 그리고 동시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사람 나랑 사는 삶이 편안해보여서 참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순간 마음이 따듯해졌습니다. 어느새 내가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 내가 더 이상 저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했습니다.
불안형의 사람은 어떤 유형을 만나느냐에 따라 불안정한 모습이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불안형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고 있는 B는 회피형H를 만났을 때의 모습과 안정형A를 만났을 때의 모습은 다릅니다. 불안형B가 회피형H와 연애할 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불안이었습니다. 회피형H는 도망가고, 불안형W는 쫓아갔습니다. 가까워졌다 싶으면 도망가 버리는 H를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갈 기세인 B는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H에게 달라붙는 B로 변해갔습니다. B는 자기가 더 노력하면 그 사람이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이런 불안형B가 회피형H와 헤어진 후, 안정형A를 만났을 땐 전혀 다른 연애양상이 나타났습니다. 안정형인 A는 관계에서 도망치지 않기 때문에 B가 A를 일일이 쫓아다닐 필요가 없었습니다. A는 B에게 연락도 꼬박꼬박 하고, 잠수 타는 일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안정형의 사람이라면 별 일 없이 A와의 관계를 맺어갈 수 있겠지만, 불안형인 B는 불안정해졌습니다. A가 자신으로부터 도망가지는 않지만, B가 원하는 만큼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A에게 사랑을 증명해보이라며 화를 내기 일쑤였습니다. B는 A가 아무리 피곤한 상황이라도 B에게 전화를 덜 하거나, 평소보다 전화를 늦게 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신호로 해석해서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B: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더 전화했어야지!!”
A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헤어짐의 신호로 속단하여 해석했습니다.
B: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너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지? 나랑 헤어지려는 거지!”
A가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행동을 할 때마다 바로 실망해버린 B는 사랑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A에게 요구했습니다.
B: “그건 사랑이 아니야!”
혹시 연애할 때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면 이런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결혼은 happily ever after로 가는 이터널 터널이 아닙니다.
불안형의 전형적인 특징은 사랑에 대한 마법적 사고입니다. 사랑한다면, 결혼했다면 반드시 어떠한 장애물도 이겨내야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운명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텔레파시 통하듯 알 것이라고 믿습니다. 진짜 인연이라면 우리 사이에 어떠한 공간도 없어야 하며, 두 사람은 무조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자신이 믿는 신념을 상대방도 그대로 믿도록 강요하는 것입니다. 불안형은 안정형이 말하는 그 어떤 자극도 이별의 신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가령, 안정형A의 회사업무가 진짜로 바빠져서 한 시간 반이 걸리는 불안형연인B의 집까지 데리러가기가 무리라고 생각이 들어 이야기하는 경우에도 B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립니다.
A: “우리 오늘 데이트는 중간에서 만나는 건 어떨까? 요즘 야근이 잦아서 쉬질 못했더니 이동시간을 줄이면 몸이 덜 피곤해서 좋을 것 같은데 어때?”
B의 속마음: 이제 우리 집까지 한 시간 반 걸려 데리러 오는 게 피곤해진 거 아냐? 처음엔 안 그랬는데 몇 달 지나니까 역시 마음이 변한 게 확실해. 나랑 헤어지려고 밑밥 까는 거면 어쩌지? 나를 좋아한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데리러 와야지!!!
A가 진짜로 피곤하다는 팩트는 B에게 중요한 정보로 인식되지 않으며, B가 지닌 내면의 불안한 감정이 전면적으로 등장하여 이성을 압도해버립니다.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속단이 만들어 낸 불안, 그래서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할 것 같은 불안에 휩싸인 채 상대방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B의 생각은 팩트에 기반을 둔 사고가 아닙니다. 감정에 따라 만들어 진 비이성적 사고입니다. 자세히 뜯어보면 논리적인 구석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중간에서 만나는 것은 합리적입니다. 애초부터 누가 누구를 데리러가고, 데려다주는 행동은 특정 한 사람의 체력과 시간을 더 많이 요구하는 행동입니다. 그것이 연인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 된다고 보기엔 납득하기 힘이 듭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면 아무리 멀어도, 아무리 힘들어도 나를 데려다줘야지! 라고 저 사람이 자신의 건강을 포기하면서 나를 데려다주는 행위로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특히 아래와 같이 사랑에 대한 마법적 사고를 가진 채 살아왔다면, 마법적 사고를 교정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법적 사고 1. 나를 사랑한다면 말 안 해도 내 마음을 알겠지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 뇌에 들어갈 길이 없기 때문에 가설을 세워야하고, 이는 개인의 추측이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가까운 연인이라도 자기생각을 말로 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정확히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법적 사고 2. 나를 사랑한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야지
사랑하는 사이라도, 무조건 모든 걸 이겨내기란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함께 최대한 극복을 위해 애써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막 대하거나 폭력을 쓰는 것은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서로에게 조심하고 예의를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조절이 안 될 때마다 네가 나를 사랑하니까 마땅히 나의 모든 땡깡을 받아줘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관계에 이롭습니다. 내 감정은 내가 처리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법적 사고 3. 나를 사랑한다면 하나가 되어야지
우리가 사랑하는 관계를 맺었다 할지라도 개인으로서 독립적인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리 서로 좋더라도 두 사람 간의 적절한 심리적 거리가 없다면 개인의 고유성을 잃어버린 채, 서로에게 의존하는 상태가 되어갈 수 있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도움이 됩니다. 의존보다는 의지하는 상태를 만들어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을 경험을 통해 학습해보면 좋겠습니다.
안정감 있는 연애란 그 사람을 만나는 동안 내가 더 가치 있게 느껴지거나, 나 스스로를 더 좋아하게 되거나, 세상을 살아가는 게 더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관계입니다. 심리적 안전감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완전히 체득해가는 시간입니다. 상대방을 믿을 수 있는 관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존재로서 오롯이 경험해볼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불안형 애착을 갖고 있더라도 안정형을 만나 안정적인 사랑을 배워간다면, 이 사람을 만나기 전보다 더 성숙해지고, 더 건강해진 개인으로서 독립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상태로 나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 감정은 내가 다스릴 줄 아는 주체적인 자기(self)로서, 사랑하는 연인에게 충분히 기댈 수도 있는 나 자신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이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획득된 애착(earned security)’입니다. 안정감은 후천적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관계를 통해서.
사랑에 대해서는 에리히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꼭 한번 필독해보시기를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진지하고 성숙한 사랑에 대해 단 한권의 책을 추천한다면 단연코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