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허구의 사랑

불안한 마음은 사랑이 아닙니다.



저는 노래가 좋으면 무한반복해서 듣는 편입니다. 요 며칠은 화사의 <마리아>를 틀어놓는데 유난히 귀에 꽂히는 가사가 있습니다.


뭐 하러 아등바등해
이미 아름다운데


아등바등할 필요 없다고 합니다. 당신은 이미 아름답다고 합니다. 이 가사를 듣고 잠시 쿵 했습니다.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다는 느낌이 드는 동시에 정말 그런가 하는 의심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나만 그런가? 아름다워지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사람 중에, 자신이 이미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는 냉소적인 목소리도 따라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계속해서 듣게 됩니다. 듣기 싫지 않은 가사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칭찬은 예쁘다 입니다. 똑똑하다, 능력 있다, 멋지다 보다 예쁘다는 말이 가장 좋습니다. 아마 마흔이 되어도 오십이 되어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예쁘다고 말해주는 것은 언제 들어도 신나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예 남편에게는 종종 예쁘다고 말해달라고 부탁해 두고,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듣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예쁘다는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이 좋다고 명확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불안한 연애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으로는 사랑받지 못하는 느낌을 동반하는 관계입니다. 연애 기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이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 무언가를 더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불안이 촉발된 상황입니다. 내가 나로서 살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맞춰야만 할 것 같은 느낌도 나를 잃은 채 불안한 연애에 휘말린 상황입니다. 이 사람과 함께하면 할수록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불안한 연애입니다.



불안한 연애를 시작할 때면 ‘내가 그 사람에게 매력 없다고 느껴지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달고 살았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는 자신이 없어지곤 했습니다. 왠지 더 똑똑하게 보여야할 것 같은데 모르는 것 천지인 나의 무식함이 들킬까봐 전전긍긍했습니다. 외모는 꾸밀수록 예뻐지니까, 살은 빼면 빠지니까, 아는 게 별로 없는 내가 유식한 사람에게 어필할 수 있는 건 외모밖에 답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매력을 발산하기 위해 외모를 치장하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기세로 돈, 시간, 에너지를 몽땅 써버렸습니다. 초고가의 메이크업클래스, 아름다운 몸매로 변신시켜주겠다는 다이어트 프로그램, 연예인들이 간다는 청담동의 헤어숍, 연예인처럼 찍어준다는 논현동의 프로필 촬영 스튜디오 등을 전전하며 나를 포장하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 보면 사치의 끝판 왕입니다.


아름다워지고 싶었습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면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외모는 나의 자존감이었습니다. 47kg를 유지하고,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연예인같이 화장하고 헤어하고, 빛나는 옷을 입어야만 사랑받고 관심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했다 차였을 때도, 내가 그에게 거절당한 이유는 내 외모가 아직 불충분하기 때문이라 여겼습니다. 그리고 혹독한 다이어트로 더 날씬한 몸매를 향해 나를 다그쳤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외모로 치장하면 할수록 저의 연애는 불행했습니다. 외모를 어필해서 이성의 관심을 끌고자 했기에, 나의 외모만을 보고 다가오는 사람과의 연애가 반복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나의 겉모습(얼굴, 몸매 등)을 보고 나에게 다가왔으니, 나의 외모가 별로라면 나를 떠날 거라는 불안이 가득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상대방이 외형적으로 드러내는 모습만을 보고 사랑에 뛰어들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을 보고 사랑하는 감정에 취했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 지, 그 사람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외모만을 보고 본능에 충실했던 연애는 잘 될 리가 없었습니다. 연애 초반의 강렬한 끌림이 식어버리면 상대방에게 느꼈던 매력도 함께 사라져버리곤 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흥미가 떨어지면 싫증이 났고, 관계를 끝내버리는 패턴이 반복됐습니다. 20대 내내 연애를 했지만 나의 외로움은 달래지지 않았습니다. 늘 혼자인 것 같고 외로움을 견뎌낼 힘이 없었습니다. 늘 누군가를 갈구했습니다. 그래서 섣불리 누군가에게 달려들었고, 거절당하거나 짧은 연애를 반복하는 등 안정적인 관계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20대의 연애를 돌이켜보면 강렬함과 괴로움, 불안함이 늘 함께했습니다.




사랑에 대해서도 미신 같은 생각을 품고 살았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나에게만은 특별한 사랑이 올 거야, 말 안 해도 다 알아야 진짜 사랑이야. 이렇게 마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던 저를 만족시킬 사랑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현실감 없이 이상적인 사랑만을 꿈꾸던 저를 돌아보면, 현실을 이탈해있던 모습이 보입니다. 사실 현실이 무엇인 지 배우지 못했습니다. 불안정한 멘탈을 가진 부모님과의 어린 시절 경험에서는 사랑이 무엇인지, 어떤 사랑을 어떻게 하는 것이 안정적인 삶인지 배우지 못했습니다.


우울한 모습으로 술 먹는 모습의 아빠는 지금 돌이켜보면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사는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 취미생활, 외모 가꾸기 등에 바빠 보이던 엄마는 타인과 섞여 살기 보다는, 회피적인 삶을 사는 중이었습니다. 불안형 아빠와 회피형 엄마는 서로 안정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저와 여동생을 키우며 20년을 함께 살았고, 그 삶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안정적으로 사랑하는 삶이란 어떤 모양인지, 보고 자랄 틈이 없었던 저는, 상상으로 사랑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 허구의 사랑을 쫓는 20대로 성장했습니다.


부모-아이 관계에서 나타나는 애착모양은 성인의 연인관계에서도 성인애착모양으로 나타납니다. 불안형의 아빠와 회피형의 엄마를 보고 자란 저는 그 희귀하다는 인구의 5%인 복합형(불안+회피)에 해당했습니다. 세상에 안정형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생각해보면 안정형의 사람들이 나에게 잘해주고 다가오면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밀어내고 거절했습니다.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은 왠지 모르게 부담스러웠습니다. ‘나에게 왜 이렇게 잘해주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나에게 잘해줄 이유가 없는데 잘해주는 것 같은 느낌, 나의 외모만을 보고 스킨십을 위해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대신에 나의 불안을 일으키는 사람들(불안형과 회피형)을 만나면 이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에게 집착하고 구속하는 불안형을 만나면, 이 사람이 진짜 나를 사랑해서 이러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가까워졌다 싶으면 잠수를 타버리는 회피형을 만날 때면, 내가 더 노력하면 다시 돌아올거라고 착각하며 몇 년 동안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던 연애도 진짜 사랑이라 여겼습니다.


내가 가진 불안정한 애착을 활성화시켜, 나의 불안을 자극하는 그 마음을 사랑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안정형과의 연애는 성사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태가 되어갔습니다. 그렇게 20대 후반, 30대 초반을 거치며 점점 외로움이 가득해졌습니다. 나에게 집착하는 불안형의 사람과의 연애에서도 지치고, 친밀해졌다 싶으면 잠수 타는 회피형과의 연애에서도 지친 저는 진짜 사랑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불안정한 연애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안정형의 사람은 나를 자극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의 나에게 불안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은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불안이라는 감정을 자극하는 한 명의 사람일 뿐이라고, 그 사람이 건드리는 나의 불안을 잠시 멈춰 바라봐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안정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고 말해줄 것입니다. 안정적인 사랑은 가능하다고, 세상에는 안정형의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러니 우리 이제 그렇게까지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등바등해야하는 관계는 불안이 활성화 된 상태임을 자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안정형과의 사랑을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훨씬 더 편안합니다.





글: Chloe Lee

그림: pinterest

https://brunch.co.kr/@itselfcompany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진짜 가족이 되어가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