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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음으로 내가 덜 고통받도록

고통스런 시간을 덜 고통스럽게 보내는 방법

10대 땐 그냥 마음이 괴로웠다. 거의 엄마아빠의 눈치를 보며, 학교에서는 애들 눈치를 보며.

혼자이고 싶지 않아서 그냥 누군가에게 맞춰주느라 마음이 괴로웠다.

20대 땐 조금씩 외부로부터 고통스런 사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사건에 '던져져서' 허우적대며 사건이 내가 되고 내가 그 사건이 되고.

그냥 아주 폭격을 맞았다고 해야하나. 그냥 침몰했다.

30대 초반엔 살아남고 싶었다. 처음엔 '생존'이었다. 그런데 연차가 쌓이고 회사를 바꿀수록, 억눌려졌던 야망이 고개를 들고 나올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자, 나는 잘 해내고 싶었다. 그 때 만들어졌다. 완벽주의, 일중독자, 성취와 사람이 주는 친밀감에 중독된 나는.

그리고 만 서른다섯,

암이란다.

출처: pinterest



암에 걸리고나니, 그 전까지 나에게 쏟아졌던 폭격들은 뭐였지? 싶었다.

진짜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죽음이구나. 싶었다.

나 어떻게 해야하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지?

그 생각 뿐이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근데 끝이 나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갖가지 질병들, '암인가?'하며 고통에 떠는 시간들.

그리고 또 내가 떠안은 사람,

엄마가 아플 지도 모른다는 것.

엄마의 CT를 일주일 앞두고,

설마 엄마도 암이라면?

하면서 고통에 떠는 시간들이 나에게 찾아왔다.

여기서 난 어떻게 할 것인가? 며칠을 고민하고 우울해하다가 결론이 났다.


어떻게든 또 된다.

나는 해결할 힘이 있다.

그러니 미리 최악을 생각해봤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일단 최악을 생각하는 건, 최악이 오면 해결하면 되고.

이왕이면 좋은 상황을 상상하자.

엄마가 아프지 않다면, 암이 아니라면,

우리는 뭘 같이 할 수 있지?

엄마랑 내가 남은 시간이 얼마인 지 알 순 없지만

짧든 길든 간에 우리가 같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해보자.


그렇게 결론을 내고 나니

상황은 그대로인데 나의 고통의 질이 달라졌다.

나는 오늘을 살 수가 있게 되었고,

나는 또 오늘 내가 할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

그렇게 나를 데려오느라 고생 많았다.

나는 결국 또 이렇게 올라올 걸

이젠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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