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번아웃에 관한 책들을 보면 입을 모아 하는 조언이 하나 있다. "무엇이든 일단 시도하라." 꼭 지금 해야 하는 일도 아니고, 당장이 아니면 하지 못할 일도 아니고, 하고 싶었던 일도 아니지만 무엇이든 시도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이 늪을 벗어나려고 무언가를 시도한 게 번아웃이 시작된 지 3년이 지나서였다. 첫 3년은 말 그대로 아예 집 밖을 나가지 않으며 집순이로 살았고, 멍 때리기 대회를 집에서 혼자 개최해 혼자 우승하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만약 "무엇이든 일단 시도하라."라는 문장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움직였다면, 1초라도 빨리 시도해 보길 바란다. 나는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당신에겐 생각지도 못한 유일한 돌파구일 수 있다.
내가 처음으로 시도한 건 '설거지'였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일터로 떠나고 집에 덩그러니 홀로 앉아 하루종일 유튜브나 티빙, 웨이브, 넷플릭스를 전전하며 열두 시간을 보냈다. 집에선 아예 뭘 챙겨 먹질 않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스무 잔씩 마셔서 배도 고프지 않았다. (집에 정수기가 있다.) 여기서 설거지란, 스무 잔의 커피를 담았던 텀블러와, 가족들이 퇴근하고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난 후의 그릇들을 씻는 거였다. 이거라도 해보자 싶었다.
그렇게 다수 전문가들의 조언대로 무언가를 시도했다. 하지만 내게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욕은 생기지 않았고, '뭐든 할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여전히 무기력했다.
또 다른 저자의 말에 따르면 멍하게 있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뇌의 어떤 부분이 활성화된다고 했다. 명상을 하면서 리프레시를 하는 것 또한 도움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건 사실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내게 전혀 도움 되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보낸 시간이 3년이었다.
'멍 때리기'는, 어렵다. 인간은 시선을 멍하니 두면서도 머릿속에선 무언가를 떠올리며 생각을 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멍 때리기 대회 같은 게 열리는 게 아닐까? 어려우니까. 잠들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백지' 상태에서 멍하게 있는 게 어렵다는 건 얼추 맞는 말이라고 본다.
하지만 난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게 있을 수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내가 이능력자는 아니니까. 초능력자도 아니고. 그리고 매년 멍 때리기 대회에서 우승자가 나오지 않는가.
이 방법은 시도해 보긴 했다. 메모 어플을 켜서,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적고 그걸 지금 할 수 없는 이유나 하고 싶은 이유를 적어보았다. 꽤 장문의 글이 화면을 채웠다. 그 가운데 몇 개를 적어보겠다.
사람들이랑 좀 잘 지내고 싶어 / 왜? / 사람들이 나를 호구로 보는 것 같아. 처음엔 도움이 될 것 같으니 다가오는데 어느 정도 친해지고 나면 꼭 뒤통수를 쌔리더라? 그래놓고 내 탓을 해. 참 세상 살기 쉬운 사람들인 듯.
영국에서 한 달 살기하고 싶어 / 왜? / 그냥 여길 벗어나면 시야가 넓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막연한 생각인가? 그렇긴 한데 어쨌든 이 사회에서 틀에 맞춰 살아가는 거 자체가 스트레슨데 뭐 어쩌라고. 다른 나라 가서 살고 싶어. 영국에서 한 달 살기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걸로.
뭐 하러 꿈을 갖고 뭐 하러 노력해? 얻어지는 게 없는데. 나이는 늘어가고 이뤄놓은 건 없어. 나도 요즘 인기 많은 박군, 임영웅 이런 사람들처럼 대기만성형인가? 슬로 스타터고 늦게 대성할 스타일의 사람인가? 당장 이력서를 넣어도 면접 전화조차 받질 못하는데 희망은 얼어 죽을.
실제로 어플에 작성했던 글이다. 이 아래로도 여덟 개가 더 있는데, 모두 한 번에 작성했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고 불편한 건지. 첫 번째 글은 그래서 사람들이랑 잘 지내고 싶다는 건지, 모두를 때리고 싶다는 건지 의도도 모르겠다. 하여튼 엉망진창인 마음이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을 좀먹고 있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바라볼 수는 있었다. 냉정하다고 할 정도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건 자신 있었기 때문에, 어떤 것들이 내 행복한 정신건강을 망치고 있는 것인지 정도는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뭐가 그렇게 싫은 건지, 예를 들어 정말 죽고 싶다면 이유가 뭔지. 이유가 있다면 그게 어째서 죽고 싶단 생각으로 이어진 건지, 이런 식으로 꼬리를 물어가며 글을 쭉 써보는 거다. 그리고 다음 날, 일주일 뒤, 한 달 뒤에 읽어본다. (사실 난 매일 읽었다.) 그러다 보면 카테고리가 생긴다. 그래서 내가 진짜 지금 해결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그게 타인의 문제인지 나의 문제인지도.
어떤 연구결과가 있다고 한다. 눈물을 흘리면 후련해진다는 말이 있듯, 펑펑 울고 나면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고. 내 번아웃의 '원인'이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정신이 건강하려면 스트레스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 옳지 않나, 하는 생각에 시도해 보았다.
그런데 웬걸… 눈물이 나지 않는 것이다. 원래는 엄마아빠 이름만 불러도 눈물이 또르륵인 감성형 인간이었는데 번아웃이 오면서 아예 감정을 소비하는 것 자체에 관심을 잃은 듯했다. 어차피 하루종일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OTT 채널들에서 보고 있었으니 슬픈 영화나 드라마들을 찾아가며 울기 위한 갖은 노력을 했다. 유튜브에서 'K-장남/장녀(가) 공감할 만한 드라마 대사' 이런 영상들이 알고리즘에 뜨길래 그런 것들도 봤다.
눈물은 났다. 엉엉 울진 않았지만 눈과 코가 빨개질 정도로 눈물을 흘리게 한 영상들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번아웃을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뭣보다… 너무 피곤했다. 물티슈도 많이 쓰고 울고 나면 기운이 다 빠져서 침대에 누워 자야 했다.
오전에 피톤치드를 마시며 조깅이나 산책을 하는 게 도움이 된다는 글을 봤다. 시간을 정해둔 것도 뭔가 이유가 있어 보이고, 피톤치드는 몸에 좋은 거니까 굳이 안 해볼 이유가 없었다. 내 인생에 체육 시간 말고는 해 본 적도 없던 오전 산책을 시도해 보았다. 본가 아파트 뒤에 산이 있는데, 길을 잘 닦아놔서 사람들이 엄청 방문하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차가운 물을 채운 텀블러를 들고 모자를 쓰고 운동화를 신고 애플워치를 차고 밖으로 향했다.
산책로는 실로 스펙터클했다. 오르막내리막이 있는 건 물론이고 사람들이 너무 빨리들 걸으니 그 속도에 맞춰 걸어야 하나 싶어 숨차게 걸어야 했다. 산길도 있고 콘크리트길도 있었는데 산길은 두 사람이 지나가기엔 좁아서 무조건 스쳐 지나야 했다. 그리고 사람이 대체적으로 많긴 했지만 산길 같은 덴 살짝 어둡기도 하고 무서웠다. 엄청 긴장하면서 걸어야 했고 그 구간을 지날 땐 에어팟으로 듣던 음악도 중지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를 스쳐간 사람도 나를 두려워하며 걸었을 것이다. 요즘은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오히려 더 무섭더라.
어찌어찌 5천 보를 채우고 집에 돌아왔다. 뭔가 뿌듯한 느낌이 들긴 했다. 첫 산책이 거의 산행 수준이었지만 만족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땀을 많이 흘렸다. 그날은 피곤했는지 일찍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엄청난 무릎 통증과 근육통에 시달려야 했다. 무려 나흘을 앓아누웠다.
이 방법은, 3년 간 집에 틀어박혀 살이 10kg 이상 찌면서 필연적으로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던 부작용을 함께 가져왔다. 본가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인데 산책 끝나고 돌아올 땐 정말 최악이었다. 그래도 시도해 본 것 가운데 TOP 5 안에 들 만큼 도움은 된 것 같다.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기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