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후야, 너 도화지 좀 줄래?”
“응.”
“아, 나 숙제 아직 안 했는데 너 거 좀 베껴도 돼?”
“…응.”
“야, 근데 너 왜 그렇게 다 해줘? 바보야?”
“…그래도…”
지후는 ‘네’라는 말에 병이 든 아이였다. 싫어도 ‘네’, 무리해도 ‘네’, 화가 나도 ‘네’. 처음에는 그게 착한 행동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들어 지후는 어떤 대답을 해야하는 상황에 놓일 때마다 멍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너, 생각이라는 게 있어?”
같은 반 지호가 말했다.
“너는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빌려달라면 다 빌려주고, 이용만 당하지.”
지호의 아무렇지 않은 말이 지후의 심장에 날카롭게 꽂혔다. 지호의 말이 자신을 향한 걱정임을 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지후는, 항상 자신을 향해 꼬리를 흔들어주던 단독주택의 리트리버를 쳐다보지도 않았을 만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리고 그날 밤, 지후는 본인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5년 인생에 단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싫다고… 싫다고 한 번만이라도 말하고 싶다…”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창문 틈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순식간에 방 안은 먼지처럼 반짝이는 입자들로 가득했고, 벽에 작고 둥근 문 하나가 ‘빠각’ 소리와 함께 생겨났다. 아치형의 문 위에는 작은 간판이 달려 있었다.
“지식상점 헤윰 – 감정을 담아 지식을 삽니다.”
홀린 듯 문의 손잡이를 잡은 지후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꿈인가…?’
문을 열자, 익숙하면서도 이곳에서 맡기엔 낯선 냄새가 풍겼다. 약간 달콤하면서도 오래된 종이 냄새 같았다. 가게 안에는 책이 공중에 둥둥 떠다녔고, 선반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기이한 물건들이 질서 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곳은 이미 지후의 방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그대로 있는지 뒤를 돌아 확인해야 했다. 아, 다행이다. 문은 그대로 있다.
그리고 중앙에 앉아 있는 검은 모자의 노인. 이윽고 지후는 칠흑같이 어두운 그의 까만 눈동자에 시선을 집중한 채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어서 와. 오늘은 네가 올 차례였지.”
노인이 미소 지었다.
“네가 사고 싶은 건… ‘거절하는 법’ 맞지?”
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할아버지가 오늘 겨우 결정지은 내 마음을 어떻게 읽은 걸까?' 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럴 필요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지후가 굳이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도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인 것 같았으니까.
노인은 지후에게서 시선을 뗀 뒤, 선반에서 조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상자엔 은색 라벨이 붙어 있고, ‘입문자용’이라고 적혀 있었다.
“거절의 힘 – 얼굴 닦는 물티슈 (단 5매 한정)”
“이걸로 얼굴을 닦으면, 입에서 자연스럽게 ‘거절의 말’이 흘러나올 거야.”
“정말요…?”
“하지만 대가가 필요하지.”
노인은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네 마음 속 오늘의 ‘분노’를 나에게 주겠니?”
“…네?”
“네가 평소라면 느끼지 못할 ‘화’. 그건 사실 인간에게 굉장히 중요한 감정이란다. 하지만 그 중요한 감정을 내게 준다면, 대신 ‘거절하는 기술’을 선물하마.”
지후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분노'는 겨우 열다섯인 지후에겐 낯선 감정이었다.
‘이런 감정이라면, 차라리 없애고 싶어.’
“좋아요.”
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기쁘다는 듯 웃으며 상자를 내주었다.
“딱 다섯 번이다. 유용하게 잘 쓰렴.”
눈을 떴다. 방금 전까지 노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 지후의 눈 앞엔 본인의 방 천장과 바스락 거리는 이불의 소리, 그리고 푹신한 매트리스의 감촉이 느껴졌다. 엄마가 깨워주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눈을 뜨다니, 자신이 조금은 성장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지후는 살풋 웃었다.
화장실에 들어간 직후, 지후는 거울 앞에서 노인에게 받은 물티슈를 꺼냈다. 그리곤 하나를 꺼내 조심스럽게 얼굴을 닦았다. 차가운 감촉과 함께, 무언가 지후의 안에서 툭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꽁꽁 묶인 목소리가 풀려나오는 기분이었다.
학교에 도착한 지후에게 친구 지호가 말했다.
“야, 오늘도 도시락 반찬 좀 나눠줘.”
지후는 입을 열었다.
“싫어. 오늘은 내가 다 먹을래.”
순간, 지호를 포함한 교실 안 친구들이 정적에 휩싸였다. 지호는 눈이 동그래졌고, 다른 친구들은 웅성거렸다.
“지후가… 거절을 한다고?”
지후는 당황했지만, 이상하게도 한편으론 속이 시원해짐을 느꼈다.
‘이게… 거절이라는 게 이렇게 쉬운 거였어?’
지후는 하루에 한 번씩, 물티슈를 사용했다. 친구들이 자신의 변한 모습을 보며 토끼눈을 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의견을 또박또박 말하는 자신의 모습이 싫지도 않았다. 어떨 땐 누군가 뭐라 하기 전에 먼저 말하곤 했다.
“그거 네가 할 차례잖아.”
“지금은 안 도와줄래.”
“이건 나한테 손해니까 거절할게.”
처음에는 친구들이 놀라고 조심스러워했다.
“지후가 무슨 일이야?”
“갑자기 성격 바뀐 거 아냐?”
지후는 속이 시원했다. 이제야 비로소 자기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언젠가부터 지후는 모든 것에 ‘아니요’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누가 어떤 걸 물어보든, 뭘 부탁하든, 반사적으로 ‘싫어’가 튀어나오게 된 것이다. 마치 세상 모든 일에 부정적인 사람이 된 것처럼.
“같이 점심 먹자!”
“싫어.”
“같이 가자!”
“안 가.”
심지어 선생님이 지후에게 채점된 시험지를 교실에 가져다 놓으라는 부탁을 했는데도 지후는 정갈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 그런 거 안 해요.”
친구가 점심시간에 매점에서 사온 초코과자를 내밀며,
“한 입 먹을래?”
“…나 간식 싫어하거든?”
이렇게 며칠만에 지후는 점점 혼자가 되어갔다. 아무도 지후에게 부탁을 하지 않았고, 아무도 지후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사흘 째 되는 날, 지후는 집에 돌아와 화장실의 거울 앞에 다시 섰다. 어느덧 물티슈는 단 한장만 남아 있었다.
“이건… 내가 원했던 모습이 아닌데…”
다시 문이 열렸다. 지식상점 헤윰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지후가 들어서자 노인은 반갑다는 인사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예상보다 빨리 돌아왔구나.”
“왜… 왜 사람들이 나를 멀리해요?”
지후가 물었다.
“싫은 건 말하라면서요. 그래서 그렇게 한 건데 왜 이렇게 된 거예요?”
노인은 천천히 말했다.
“거절이란 건, 단순히 싫다고 말하는 기술이 아니란다.”
“그럼요?”
“거절은,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일이지. 거절은 칼이 아니라, 울타리여야 해. 그런데 지후 너는 거절을 칼처럼 썼구나.”
노인의 말은 어렵지 않았다. 본인의 잘못임을 인지한 지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마지막 물티슈는 버려라. 그리고, 너만의 방식으로 거절해 봐. 그럼 그게 진짜 네 것이 된다.”
다음 날, 지후는 조금은 처진 기분으로 교실에 들어섰다. 그때 지호가 다가왔다.
“야, 도시락 좀…”
지후는 깊게 숨을 쉬었다.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내 마음까지 지키는 법이라고 했지. 노인의 말을 떠올리며 지후는 천천히 말했다.
“오늘은 내 반찬이 적어서… 미안하지만, 나 혼자 먹고 싶어. 내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오늘은 내 마음을 먼저 챙기고 싶어.”
지호는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그날 이후, 지후는 무조건 '아니!'를 외치는 아이가 아닌, 진정한 거절을 할 줄 아는 아이가 되었다. 주변 친구들과 선생님의 부탁 등 필요한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와 함께 자신의 마음도 함께 전달하는 아이가 된 것이다. 그렇게 지후는 마냥 ‘착한 아이’가 아니라 ‘존중받는 아이’가 되었다.
그날 밤, 헤윰의 문이 천천히 닫혔다. 노인은 조용히 말했다.
“또 하나의 마음이 잘 성장했군.”
그리고 갈색의 오래된 노트에 한 줄을 적었다.
“지후 – 감정 회복 1단계 완료. 거절의 지혜 습득.”
노인이 노트를 덮자, 책이 떠다니는 공간에 다음 손님의 이름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민채 – 타인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그리고, 지식상점 헤윰의 문이 또 한 번 바람과 함께 열렸다.
1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