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비너스를 자처한 여인들
블랙 비너스를 자처한 여인들,
Keeping Up With The Kardashians, Anaconda, Formation
관종들의 세상
‘관종’을 아시는지. 이는 ‘관심종자’의 줄임말로,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과도한 노력을 표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미국의 심리학자 사티어의 '의사소통 유형분류'에 의하면 '산만형'에 해당하는 부류일 것이다. "대개 목적성이 결여된 행동을 통해 늘 화제의 중심이 되기를 바란다"는 특성 때문이다. 하지만 산만형 사람들은 '관종'의 등장 이전부터 있었다. 인스타그램의 ‘관종’ 태그가 이만 삼천개를 넘어가는 지금, 관심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행동양식과 이를 대하는 대중의 태도 역시 과거와 달라 보인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페이스북의 ‘좋아요’를 받기 위해 자동차 바퀴에 다리를 깔리면서 자해하는 행위는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프로 관종'들은 바보가 아니다. 온라인 유저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각종 기행으로 페이스북의 유명인사가 된 신태일은 월 수입이 1천만 원 이상이라고 밝혔다. 그의 많은 팔로워들과 좋아요 수가 광고료로 직결된 덕분이다. 오디언스의 반응을 유도하는 행위 자체가 돈이 되는 거다. 반응의 긍정/부정적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나날이 자극성을 더해 경쟁하는 관종들이 브랜드가 되는 현실, 바야흐로 관종들의 세상이다.
관종: 세계적 트렌드
관종이 비즈니스 모델이 되는 세태는 국제적 현상이다. 대중의 심층의식에 자리잡은 ‘욕구’를 파악하고, 이를 제공하는 인물들이 늘어나고 있다. 때로 그 인물들은 손가락질 받는 위치를 넘어선다. 사회의 트렌드를 이끌고, 가끔은 기존 세태에 변화를 가져오는 영향력을 자랑하기도 한다. 자신의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리얼리티 쇼 ‘Keeping Up With The Kardashians’를 통해 미국의 스타가 된 킴 카다시안이 대표적이다.
Keeping Up With The Kardashians – 카다시안 따라잡기
2007년부터 미국의 E! 채널에서 인기리에 방영중인 ‘Keeping Up With The Kardashians’(이하 KUWTK)는 12시즌을 맞이한 장수 프로그램이다. ‘유명해서 유명한’ 킴 카다시안과 남편이자 유명 힙합 스타인 칸예 웨스트, 자매들, 어머니와 (지금은 성전환 수술을 한)아버지의 일상을 다룬다. 가족의 일상을 다룬다고 하여, ‘인간극장’처럼 따뜻한 콘텐츠를 기대한다면 큰 오산이다. KUWTK는 ‘합법적으로’ 방영되는 ‘가족’ 소재의 콘텐츠 중에서 가장 자극적이다. 카다시안 패밀리가 자발적으로 그들의 삶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이 쇼에서 어머니의 자위와 이를 놀리는 딸들의 모습을 접하기란 어렵지 않다. 각종 사회적 금기를 건든 덕분인지 대중은 카다시안 패밀리의 사생활 소비에 열광했고 쇼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관종의 일상이 인기상품이 되는 현실에서, ‘Kardashian’이란 이름은 브랜드가 되었다. 킴 카다시안 일가는 이를 놓치지 않고 자신들의 제국을 설립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물론, 자매 각각의 사업 아이템을 구축하고(게임, 패션, 메이크업 상품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굳혔다. 그들의 부끄러울 법한 사생활을 따라잡으려는 십대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은 인스타그램만 잠시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카다시안을 향한 비난 역시 거세다. 하지만 비난 역시 관심의 일종이다. 그렇다면 대중은 왜 카다시안 일가에게 관심을 주는가. 이 질문은 상당히 중요하다. 카다시안의 성공 비결이자, 전세계적 ‘관종’ 트렌드를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스펙터클을 제공하라
리얼리티 프로그램 없이 카다시안 제국은 설립될 수 없었다. 이 쇼의 가장 큰 장점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자극적인 볼거리’(스펙터클)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대중은 TV를 통해 킴 카다시안의 양아버지이자 미국의 올림픽 영웅인 브루스 제너가 ‘케이틀린 제너’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킴 카다시안의 속옷 냄새가 어떠한지 알게 되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자극화되는 동시에 그들은 유명세와 재산을 얻었다. 1시즌에 등장한 그들의 저택과 12시즌에 등장한 저택을 비교하면 단번에 이해될 것이다.
스펙터클을 만드는 방식
1) 화려한 비주얼: KUWTK의 12번째 시즌 홍보 영상을 보면, 카다시안 여자들의 화려한 모습에 압도된다. 당당한 워킹과 웃음기 없는 도도한 표정, 몽환적인 배경음악과 감각적인 스타일링은 흡사 럭셔리 브랜드의 패션필름을 보는 느낌이다. 자극적인 신변잡기에 급급한 프로그램이 본질이라도, 포장만큼은 명품이어야 한다. 가장 큰 장점이 ‘시각성’인 그녀들의 성공 비결은 ‘화려한 비주얼’을 통한 자기포장이다.
거대한 엉덩이와 가슴, 태닝한 피부와 검은 머리, 컨투어링 메이크업으로 대표되는 카다시안의 여자들의 비주얼은 만들어진 것이다. 카다시안 제국의 일등공신인 킴 카다시안이 거대한 엉덩이로 부각되고 대중의 관심을 받은 이후로 자매들은 ‘시술’과 ‘수술’을 통해 그녀와 비슷한 상을 구축했다. 킴을 제외한 나머지 자매들이 몰개성의 길을 택한 것은 아니다. 대중이 그녀들에게 원하는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비즈니스 수단의 일환으로 선택한 길일 뿐이다.
2) 자발적인 사건의 왜곡: ‘꺼진 사건도 다시보자’가 그녀들의 모토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녀들의 ‘사건 부풀리기 능력’은 대단하다. 10번째 시즌의 첫 에피소드를 보자. 브루스 제너(아직 성전환 수술을 진행하기 전이다)는 크리스 제너와 결별 후, 자신의 양녀인 킴벌리 카다시안과 대화 자리를 가진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브루스 제너의 휴대폰으로 전 부인 크리스 제너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브루스 제너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즐겁게 통화했다. 이에 킴벌리는 둘의 관계를 의심하며 집에 돌아와 자매들과 어머니에게 본 바를 전한다. 쇼의 분위기는 전화 한 통을 기점으로 심각하게 흘러간다.
결과적으로, 딸 킴벌리의 오해가 원인이었다. 부녀는 화해하며 정을 다진다. 문제의 원인은 시덥잖은 통화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TV는 한 시간 동안 ‘전화 한 통’의 의미를 추적한다. 통화라는 사소한 장치를 통해 결별한 남편과 친구의 사랑을 의심하며, 딸들과 아버지의 불화를 바라보는 여성의 이야기는 미디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카다시안 가족은 자발적으로 사건을 과장하며 왜곡한다. 왜곡된 볼거리를 위해 출연진 각자가 '역할'을 형성하고 맡은 바를 충실히 이행한다.
3) 은밀한 소재 ‘성’: 대중은 사적이고 은밀한 볼거리에 열광한다. 특히 소재가 ‘성’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관음증적 욕구 때문일 것이다. 카다시안 가족은 대중의 관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자신들의 은밀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킴 카다시안이 리얼리티 스타가 되기 이전에, 섹스비디오로 유명세를 얻은 사실 때문일까. 유독 KUWTK은 성적인 소재가 자주 등장한다. 타인 앞에서 가려지고, 은밀해야 할 성은 카다시안 가족에게 거리낌없이 표출할 이야깃거리다. 대중의 환상과 심층의식 깊이 자리잡은 페티시는 KUWTK를 통해 충족된다.
소셜 미디어 시대의 비즈니스 리더
사실상 미국인의 ‘더러운 빨랫감’을 자처하는 카다시안 가족은 대중 전체의 ‘욕받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비난 이면에 카다시안의 진가가 존재한다. 그들은 성공한 사업가이며, 누구보다 대중의 니즈를 정확하게 간파했다는 사실이다. 미디어에 비추어진 카다시안 가족의 이미지를 가장 뚜렷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카다시안 가족 그 자체다. 그들 스스로가 노출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SNS가 대중과 소통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된 지금, 그들은 각자의 채널을 통해 끊임없이 수용자 반응을 확인하며 대중이 원하는 상에 부응하려 노력한다.
킴 카다시안의 의붓동생인 카일리 제너는 입술 필러를 통해 미국인이 바라는 ‘카다시안 상’에 자신을 맞췄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수많은 십대들이 자신의 입술을 따라하고 싶다는 니즈에 착안한 그녀는 ‘립 키트’를 발매하였는데, 그녀가 가장 자신있는 플랫폼인 인스타그램을 통해서만 홍보했다. 그녀의 립 키트는 온라인 한정 판매에도, 발매 직후 완판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글루모바일은 킴 카다시안을 주인공으로 만든 ‘킴 카다시안: 헐리우드’ 게임을 발매하였는데, 그 해 매출의 30%가 이 게임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카다시안의 엉덩이를 메신저로 보내자’는 기획의도에서 출시된 ‘키모지’ 앱은 앱스토어 엔터테인먼트 부문 1위를 기록했으며, 사이트가 마비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강력한 소셜 미디어 파급력과 화려한 비주얼이 주무기인 그들은 각자의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했다. 그들의 대중 니즈 파악 도구가 인스타그램이라는 점, 상품 홍보 도구가 PPT가 아닌 셀피라는 점이 기존의 '성공한 사업가상'과 다르다고 해서 얕볼 수 없는 이유다.
소셜 미디어 시대의 오피니언 리더
성공한 비즈니스 리더인 카다시안 가족은 성공한 오피니언 리더이기도 하다. 그녀들이 끊임없이 생산한 파격적인 콘텐츠는 사회적인 논의 대상이 된다. 킴 카다시안은 지난 ‘세계 여성의 날’,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전신 누드 셀피를 업로드했다. ‘과연 관종답다’는 의견이 우세했고, 여성의 성적 대상화에 대한 지탄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녀는 대중의 비난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셀피를 올린 직후, 한 시상식의수상 소감에서 “죽을때까지 누드 셀피를 업로드하겠다”고 공언했다. 과연 그녀는 무엇 때문에 옷을 벗은 것일까?
킴의 행동이 사회적 반응을 의도한 것인지 알 길은 없으나, 실제로 누드 셀피 소동 직후 여성인권 담론이 활성화된 것은 사실이다. 슬럿 셰이밍(slut shaming: 여성의 스타일에 대해 헤프다고 수치 주는 것)이 화두에 올랐고, 여성이 자신의 몸에 자부심을 가지고 드러낼 자유를 누리는 것이 문제인지에 대한 토론이 쏟아졌다. 업로드 초반 '신체 노출'에 초점을 맞춘 비난으로 일색이던 대중의 반응 사이 긍정적인 시선도 피어났다. "아직까지 남성주의적인 사회에서, 여성이 ‘섹시하게 입는 것’은 남자를 유혹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여성의 성적 주체권은 여성 본인에게 있다"는 의견이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더 나아가 규정화된 여성성을 강화하는 코르셋 답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블랙 비너스
‘호텐토트(열등인종이라는 뜻)의 비너스’ 혹은 ‘블랙 비너스’로 불린 사라 바트만을 아시는가. 문화연구에서 인종차별과 관음증, 여성학대의 대명사가 된 사라 바트만은 19세기 남아공의 한 부족인 코이코이족 출신의 여성이다. 가축을 사육하며 비교적 원시적인 삶을 향유한 코이코이족 여성은 독특한 외양으로 유럽인의 관심을 모았다. 140 cm 정도의 작은 키와 윤기나는 검은 피부, 도드라진 광대뼈와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신비한 시선, 깊은 보조개 역시 화제의 원인이었지만 유럽인이 가장 관심을 가진 부분은 거대한 둔부와 축 늘어진 음부였다.
19세기의 유럽은 제국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 면모가 사고가 잠식한 사회였다. 당시 크게 인기를 끈 ‘괴물쇼(freakshow)’의 경우, 유색인종을 전시하는 ‘인종전시’가 한창이었다. 사라 바트만 역시 유럽인의 꼬임에 넘어가 피카디리 전시장의 간판 상품이 된다. 여느 유색인종과 달리, 독특한 둔부와 성기를 가진 사라 바트만은 대중의 성적 환상이자 페티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는 나체로 12시간 동안 전시되어야 했고, 열악한 환경 때문에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사망 이후에도 그녀의 몸은 관음의 대상으로 소비되었다. 그녀의 음부와 둔부는 절개되어 박제되었고 신체는 대중에게 전시되었다.
사라 바트만의 경우가 기존의 인종전시와 다른 이유는, 그녀의 신체가 유럽인의 성적 환상을 위해 소비되었다는 사실이다. 당대 서양에서 흑인에게 부여된 특수성 때문에, 관음적 욕구는 인류학적 알리바이를 획득했다. 자연스러운 타자화 과정을 통해서 사라 바트만의 신체는 읽기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녀의 음부와 둔부를 둘러싼 분석은 ‘원시적인’, ‘짐승’ 과 같은 수식이 함께했다. 사라 바트만은 관음증의 희생양이 되어 한 사람이 아닌 도구로, 그녀의 인생은 파편으로 소비됐다.
카다시안,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다시 카다시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호텐토트의(열등한) 비너스’와 ‘킴 카다시안’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실 킴 역시 대중에게 ‘열등한’ 이미지가 부각된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관심 받기 위해 사생활을 파는 한심한 여자’라고 치부하며 "신이시여, 카다시안을 데려가고 프린스와 데이빗 보위를 돌려주세요"라고 외치는 포스트를 공유한다. 또한 에로스를 상징하는 성적인 은유 ‘비너스’ 역시, 킴 카다시안에게 더없이 적합한 수식이다. 무엇보다 거대한 둔부에 대중의 시선이 집중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킴 카다시안을 오늘날의 ‘호텐토트의 비너스’로 볼 수 있을까.
앞서, 사라 바트만이 관음증에 의해 파편화되었고, 파편은 ‘읽기의 대상’이 되어, 하나의 개인으로 성립될 수 없음을 이야기했다. 카다시안 역시 소셜 미디어와 TV에 보여진 수많은 단면들로써 대중에게 인식되었다. 하지만 킴이 트위터 답장을 보내주고, 카일리가 인스타그램의 댓글들을 확인했다고 해서 대중이 그녀들을 온전히 인식했다고 볼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대중이 읽을 수 있는 부분은 일부의 조각(제작된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관음증에 부합하는 스펙터클을 제공하고, 페티시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사라 바트만과 카다시안의 공통점이다. 그럼에도 사회적 위치가 현저히 다른 두 대상은 ‘페티시화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카다시안의 여자들은 ‘스스로’ 관음증의 주체가 되었다. 미디어에 비추어진 자신들의 이미지를 명확히 알고 있으며, 뉴미디어의 시대에서 콘텐츠를 ‘직접 공급’하며 욕구에 부합하는 동시에, 대중의 내면에 숨겨진 새로운 욕망을 도출하기도 했다. 물론, 차별과 무지의 희생양인 사라 바트만의 비극을 그녀의 선택, 혹은 주체성의 유무로 돌리려는 것은 아니다. 카다시안이 ‘스스로’ 열등한 비너스를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와 문화의 변화 덕분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관음을 이용하여 대성공을 거둔 카다시안의 사례는 19세기의 유럽의 대중과 2016년의 대중이 지닌 욕구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관음 제공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서 대중의 반응과 사회적 여론도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대중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강제로 '보여지는' 것인지, 혹은 자발적으로 '보여주는' 것인지는 엄연히 다르다. 사라 바트만의 전시된 나체는 당대 유럽인의 파렴치한 욕구를 보여주는 사례에서 그쳤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을 통해 전시된 킴 카다시안의 나체는 흥미롭게도 기존 사회에 저항하는 (자의든 아니든)페미니즘적 논의를 이끌어냈다.
콘텐츠를 통해 기존 관습에 저항하는 스타들의 등장 역시 환영할 일이다. 흑인 여성이자 유명 랩퍼인 ‘니키 미나즈’는 ‘Anaconda’ 뮤직비디오에서, 흑인 여성을 향한 기존 사회의 남성주의적 시선을 직접적으로 꼬집었다. ‘세상에, 저 엉덩이를 봐’ 같은 직접적인 가사와 함께 뮤직비디오 내내 트월킹(twerking: 엉덩이를 들이대고 흔드는 춤의 일종)하는 그녀는 남성 랩퍼인 드레이크를 끊임없이 유혹한다. 의자에 앉은 드레이크에게 랩댄스를 시도하며 자신의 신체를 뽐내던 그녀는 욕구를 제어하지 못해 그녀의 엉덩이를 만지려는 드레이크의 손을 강하게 뿌리친다. 그녀는 승리를 거둔 듯 당당하게 카메라 밖으로 나서며, 본인의 욕구를 해소하지 못한 드레이크는 무기력하게 고개를 숙인다. 여성의 성적주도권은 남자가 아닌 여성에게 있으며, 성적인 은유가 성관계를 의미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연출이다. 니키는 여성인권 외에도 흑인을 향한 고정관념까지 염두하여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정글 컨셉으로 제작된 세트장은 ‘흑인’을 향해서 과거부터 지속되어 온 ‘원시적’, ‘야만적’ 이미지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니키 미나즈 외에도 흑인 여성 가수 비욘세 역시 ‘formation’의 뮤직비디오에서, 흑인을 향한 사회의 시선을 비판하는 동시에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을 보였다. 니키미나즈와 비욘세 모두, 콘텐츠라는 조각을 통해 사회적 논의를 이끌었다. 조각난 자신을 힘껏 던져 대중의 얼어붙은 고정관념에 금을 내는 행위, 오늘날의 비너스가 선택한 방식이다.
개인에게 주어진 수많은 파편들
그렇다면 우리는 콘텐츠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200년 전의 유럽과 달리, 우리에겐 '기존 관습에 저항하는 수많은 개인’들이 존재한다. 단단히 굳어버린 관념의 콘크리트에 금을 내는 것은 그들이 심은 나무다. 그러나 나무를 베고 콘크리트를 보수할 것인지, 거름과 지지대로 나무를 키울 것인지 논의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몫이다.
소셜 미디어의 발전으로 허물어진 콘텐츠 제작자와 수용자의 경계도 반길 거리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발제하여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현대 사회의 콘텐츠는 사회 담론을 이끄는 도구이자 무기다. 콘텐츠를 통한 관심을 갈구하는 자 '관종'과 관심을 주는 자 '대중' 모두 자신의 무기에 따른 책임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2016년 3학년 1학기, 문화예술세미나 리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