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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생활자KAI Jul 11. 2019

앞으로 걸어봐으니, 뒤로도 옆으로도 한 번 걸어볼까?

내 인생 최악의 크리스마스였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떠나온 여수 밤바다를 바라보며.. 남편은 멀쩡히 잘 다니고 있던 직장을 그만두고 "독일"로 저널리즘 박사 유학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독일을 가겠다고?!"


내 귀를 의심했다.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뜻밖의 나라, 뜻밖의 계획이 그의 입에서 너무나 당연하다듯이 흘러나왔다. 이 사람에게 타인을 무력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오랫동안 보아 온 얼굴이 낯설어 보였다. 괘씸했다. 거주의 이동이 필요한 이 막대한 프로젝트를 나 몰래 1년 동안 세워왔다는 사실은 배신감에 몸서리치게 했다.


내게 독일이라는 나라는 관심사 밖의 나라였다. 여행을 무지하게 좋아하는 나였지만 독일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기껏해야 맥주, 축구, 자동차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는 독일어라고는 '당케'와 '구텐탁'이 전부였다. 독일은 나에게 먼 나라였고 내가 그곳에 산다는 것은 더욱더 먼 미지의 세계였다.




안정과 변화의 시소 타기

 

우리는 서울에 사는 평범한 중산층의 30대 부부였다. 내년쯤에는 대출을 좀 받아서 집을 사고, 아이를 가질 수도 있겠지.. 정도의 계획을 세우던 보통 또래 부부였다고 할까. 불행히도 이러한 일련의 계획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남들은 취업 못해 안달인 방송국을 10년째 다니고 있던 남편은  탈출하지 못해 안달인 1년의 시간을 나에게 내색한 번 없이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10년을 한 직장에서 살았으니
이제는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어



당시 한국사회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소개된 번 아웃 증후군이 회자될 때였다. 내 영혼의 속도는 시속 10km도 채 되지 않는데.. 몸의 속도는 시속 100km를 매일매일 달려가야 한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닌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들이 대다수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인생이 무엇인지.. 우리는 왜 그렇게 열심히 일 하는지.. 왜 돈을 버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앞만 보고 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바보 같은 짓 임에 틀림없었다. 반복된 레이스에 지쳐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지만  '돈'이라는 사슬에 묶여 영혼의 외침은 음소거가 되어 버린다. 그것은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 같은 것이었고, 남편의 경우 그 폭탄이 터진 셈이었다.

 

어떤 일에서 10년을 했으면 할 만큼 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정적으로는 그를 이해했다. 하지만 큰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정년이 보장됐던 남편의 직업은 배우자인 나로서 쉽게 버리기 힘든 달콤함이었다. 물론 그에게는 계륵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오히려 남편은 이런 나의 반응을 의아해했다. 방송작가라는 남들이 봤을 땐 자유로운 직업과 여행을 수십 번 다녀왔으며 여행책까지 낸 나이기에 외국 생활을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일 줄 알았나 보다. 그의 생각과 달리..



나는 수비가 강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이었다"라고 표현한 것은 나 역시 그렇지 않은 사람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남편의 느닷없는 황당무계한 계획에 날을 세우며 반대 깃발을 펼쳐 든 나는 지극히 안정지향적인 인간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일궈온 울타리를 무너트리고 싶지 않았고,  안정된 보금자리 안에서 일상을 영위하고 싶었다.


반대를 하면서도 이 싸움의 승자가 남편일 것임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하고자 하는 결심이 선 사람을 막을 수 없다. 부모님마저 치밀하게 세워진 그의 '3단 고집' 앞에서 혀를 내둘렀다. 남편의 꿈을 반대할만한 자격이 내겐 없었고, 인생이라는 길을 두고 봤을 때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항상 가는 길로만 가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도가 정확한 지 대조하기 위해 인생이라는 길에 오른 것이 아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목적지가 똑같은 길을 누가 빨리 뛰어가나 경주만하다 이 세상이 끝난다고 상상해보면 그것은 몹시도 슬픈 일이었다.


정해진 길은 없다. 사실 아무도 정해진 길로 가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냥 남들처럼..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 길을 따라 걸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도를 접고 여기저기 헤매다 보면 차츰 길이 보이고, 때때로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나의 모습도 보일 것이며,

곳곳에 숨어있는 비밀스러운 보물처럼 인생의 신비가 베일을 벗고 있을 수도 있다.

한 번 사는 인생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보며 나만의 지도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6개월의 전투 끝에 공교롭게도 결혼 2주년 기념일에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앞으로 걸어봤으면 뒤로도 걸어보고 옆으로도 걸어봐야지.
그래야 나한테 맞는 걷기 방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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