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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생활자KAI Jul 20. 2019

집을 구하는데 ‘자기소개서’가 필요하다고요?

취업 관문만큼 험난했던 독일에서 집 구하기

사람이 살아가는데 최소한의 필수 조건 ‘의식주’.

먹는 것과 입는 것이야 어찌어찌 내 뜻대로 해결하면 된다지만 ‘주’는 좀처럼 내 뜻대로 잘 되지가 않는다. 특히 내 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물론 한국에서도 집 구하기는 힘들지만, ‘돈’이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원하는 집과 돈이 맞으면 선택권은 나한테 있다. 부동산 중개업자 역시 돈이나 거주 기간 외에는 딱히 나의 인적사항에 대해 묻지 않는다. 가령 직업이 무엇인지, 흡연을 하는지, 평소에 청소를 잘하는지 따위의 질문은 오히려 실례일 수 있을 것이다. 세입자도 마찬가지로 집에 근저당이 잡혀 있느냐 없느냐.. 즉 내 돈이 안전한가 가 중요하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한마디로 '돈' 이 있어도 집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지금까지 임차/임대에 대해 가지고 있던 한국인의 상식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우리를 맞이했다.


첫 번째로 아연했던 것은 집을 구하는데 자기소개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독일 친구는 우리에게 조언했다.


“우선 자기소개서를 써야 돼.
되도록이면 자세히 쓸수록 좋아.”


음.. 어..엇? 자기소개서? 그것도 성심성의껏?!

아니 집을 구하는데 자기소개서가 웬 말이냐 싶었지만, 로마에 왔으면 로마의 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자기소개서를 썼다. 집주인 입장에서 봤을 때 최대한 마음에 들도록 강점을 썼다. 한국에서의 직업, 독일에 온 이유, 독일에서 무엇을 하는지에 관해 기술했으며, 흡연을 하지 않고 애완동물을 키우지 않으며, 아이가 없고, 악기를 다루지 않으며, 청소를 즐겨(?)한다는.. 최대한 우리가 집을 깨끗하게 사용할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 줄 만한 내용들을 썼다. 다시 20대로 돌아가 취업전선에 뛰어든 취준생이 된 것 같았다. 그만큼 절박했고 막연했다.


열과 성의를 다해 자기소개서를 작성한 뒤 부동산 홈페이지 및 각종 어플들을 들락거리며 집을 검색했다. 마트를 다니며 지역 신문 부동산 코너도 체크했다. 아직도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의 경우 지역 신문에 집 공고를 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한 고비 넘겼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문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마중을 나오곤 했는데, 집을 보는 와중에 예기치 못한 난항에  봉착했다.


독일 집에는 주방이 없다?!


주방은 필수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한국과 달리 주방 없는 집이 절반 이상이었다. 가격과 위치 면에서 괜찮다 싶으면 주방이 없었고, 주방이 있는 집은 1/3 정도 비쌌다. 독일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게 직접 만드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고, 또 어떤 이들은 아예 주방 없이 살기도 한다. 내 집이 아닌 월세에 주방을 설치했을 시 나중에 집주인이나 새로운 세입자에게 돈을 받고 팔거나 아예 전체를 다 떼어서 가져간다. 주방을 떼어 가다니.. 대체 싱크대며 인덕션을 어떻게 다 설치하는건지.. 한국인의 통상적인 개념으로는 이해불가였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당연한 것이었고 살수록 느낀 것이지만 이 사람들은 참으로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많았다.


도무지 주방을 만들 엄두가 나지 않았던 한국인 두 사람은 주방 옵션을 우선으로 집을 봤다. 마음에 드는 집을 고르고 자기소개서를 보내면 임대인이나 현재 살고 있는 세입자 혹은 부동산 중개인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여기서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될 것은, 집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겠다는 의미이지 계약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겨우 한 관문에 발을 디뎠을 뿐인거다.



단 한 통의 답장도 없었다


불행히도 수 십 통의 자기소개서를 보냈지만 단 한통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원인을 분석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영어로 편지를 보냈기 때문은 아닐까 결론을 내렸다. 물론 영어가 아예 안 통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긴 독일이었다. 다시 어줍지 않은 독일어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형편없는 독일어라도 성의를 보이는 편이 더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문과 독문 두 가지 버전의 자기소개서를 또다시 수 십통 보냈다.


아침에 눈 뜨면 집을 검색하고 자기소개서를 보내다 곯아떨어지는 하루하루가 반복됐다. 대략 한 10통에 2~3통 꼴로 답장이 왔는데 겨우 받은 2~3통 중에서도 절반은 거절의 표시였다. Leider(유감스럽게도)가 제목으로 있는 이메일은 읽어보기도 전에 공포가 생길 지경이었다.


우리나라에 왜 왔니?


마치 어렸을 때 하던 놀이 ‘우리 집에 왜 왔니?’처럼 이 사람들이 작정하고 자기들끼리 손을 잡고 ‘우리나라에 왜 왔으냐’며 동양인 두 명을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남편과 결혼해서 이 시기에 가장 많이 싸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무엇보다 나는 이때까지도 남편의 결정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었고, 집 구하기가 증명하듯 이 땅은 우리를 반기는 것 같지 않았으며(따지고 보면 우리를 반길 이유도 없다.) 심지어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날씨는 매일이 짙은 잿빛이었다. 하나 덧붙이자면 오롯이 남편만 믿고 수 만리를 날아왔는데 내 기대보다 능숙지 못한 그의 독일어 실력에도 화가 났다. (물론 그는 영어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지만, 독일어 어학 성적을 따고 왔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독일어가 유창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남편도 독일은 처음이었다.



그도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두가 반대한 결정을 독단적으로 내린 남편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고 여겼고, 집 역시 그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미안하지만, 그때의 나에겐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이의 힘겨움 따위는 배려할 여력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좌절뿐이었던 나날들이 이어지면서..

날카로워진 각자의 날이 서로를 마구 할퀴었다.

힘들 때일수록 힘을 모아야 한다는 말은 진부한 동화 같은 주술일 뿐이었다.

정신적으로 피폐한 상황에서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한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가뭄에 콩 나듯 간헐적으로 답장이 왔다. 집을 볼 수 있는 즉 후보군 자격에 오른 것이다.


둘러봤던 독일 집들은 하나같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멋졌다. 따라해보고 싶은 인테리어가 많았달까.




몇 몇의 집을 보기 시작했는데.. 우리가 봐도 괜찮은 집은 마치 모델하우스 분양 마냥 몇십 명의 사람이 운집했다. 이런 집은 당연히 우리에게 떨어질 리가 만무했기에 바로 포기하고 나왔다.


우리의 아킬래스 건인 두 번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순서상 집을 보고 마음에 들면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계약 의사를 말한다. 그럼 다시 집주인이 서류 검사를 한다. 이 단계에서 '재직증명서'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즉 심사에서 중요한 것은 ‘직업’이다. 고정 수입이 있느냐, 월세를 낼 자격이 있느냐가 관건인데,  학생 신분인 남편은 집주인 입장에서 반길만한 세입자가 아니었다. 나의 경우 독일에서도 한국 방송 일을 하고 있어서 매달 고정 수입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독일 수입이 아니기 때문에 반영해 줄 수 없다’는 매몰찬 답이 돌아왔다. 보통의 유학생들은 부모님이 재정 보증을 하지만 시댁 어른은 이미 공무원을 정년퇴직하신 연금수급자였기에 그 또한 할 수가 없었다.


임대인은 왜 이토록 까다로운가?


이토록 세입자가 되는 일이 어려운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계약 만기가 되면 임대인이 마음대로 전세 혹은 월세금을 올릴 수 있는 한국과 달리 독일에서는 법적으로 그럴 수가 없다. 계약기간 동안 월세가 몇 달 밀린다고 해서 무턱대고 강제로 나가라고 할 수도 없다. 부동산 중계료 역시 임대인만 지불한다. 계약이 체결되면 세입자가 ‘갑’이 된다. 물론 3~5년이 지난 뒤 평균 물가를 반영해 올리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대체적으로 처음 들어온 월세를 지속한다. 우리 역시 지금 이 집에 3년째 살고 있는데 동결이다.


그래서 집은 어떻게 구했냐고요?


거의 지옥을 허덕이던 우리에게 동아줄이 떨어졌다. 아마 당시 우리 입장에서는 설사 썩은 동아줄이었어도 잡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 동아줄은 천사가 내린 것이었다. 외국인 유학생 부부를 불쌍히 여긴 부동산 중개업자의 도움이 컸다. 어쩌면 그녀 역시 이민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애환을 더 헤아렸을지도 모르겠다. 동유럽에서 온 우스노브 아주머니는 자신이 생각건대 이 사람들은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 몇 달 살고 갈 뜨내기가 아니며 됨됨이가 바르다며 집주인을 설득해 주었고.. 결국 우리는 1년 치 월세를 한꺼번에 내고 이후로는 매달 내는 조건으로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계약이 성사되었음을 알려온 우스노브의 전화에 쾌재를 불렀다. 집을 구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했던 지난 두 달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임대차 계약서가 20장?!
까만색을 글자요 흰색은 종이이니..


끝날 때 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익히 독일 부동산 계약서가 많다는 내용을 들은 터라 계약 전에 미리 받아보았는데, 20장은 족히 넘었다. 이해할 수 없는 글자들이 빼곡했다. 그저 까만색은 글자요, 하얀색은 종이였다.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또 언급하겠지만 장대한 독일 문서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집을 구하고 나서야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정착’이라는 단어에 아주 작은 점 하나 정도를 찍을 수 있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내가 기댈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음에 얼마나 큰 기쁨과 성취욕을 느꼈는지 그때의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게 구한 나의 집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네


 <즐거운 나의 집>가사가 이렇게 좋았었나? 노래를 종일 흥얼거렸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언정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같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집이 있다는 것, 내 몸뚱이 하나 누일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안정감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외국에서는 진정 막대한 존재감을 나타냈다.       

  

住居 (주거): 머물러 살음. 어떤 곳에 자리 잡고 삶


독일이란 그 어떤 곳에 '주거'.  

자리 잡고 살게 되었다.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니 비로소 두 발 쭈욱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겨우 겨우 끙끙대며 하나의 집을 그렸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것을 그려야 할지..

얼마나 더 그려야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지..

아직은 까마득하기만한 그런 꿈을 그리며 독일에 와서 처음으로 푹잤다.

꿀잠이었다.




<더 많은 독일 이야기는..>

https://blog.naver.com/itsk2h


*지극히 주관적인 독일에서의 삶에 대한 기록입니다.

개인적인 상황 및 주마다 법이 다른 독일 특성 상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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