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이방인이 되어보니 이것은 무척 슬픈 일이었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by 여행생활자KAI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방인’이란 단어를 좋아했다. 이 단어를 입 밖으로 발화했을 때 어감이 주는 이국적인 느낌, 진짜 내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인 것 같은 생경한 기분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그런 기질 탓에 부단히 여행을 다녔던 것도 같다.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며칠을 보내다 훌쩍 또 다른 나라로 가버리는 방랑자의 시간은 자유 그 자체였다. 그 무엇에도 예속되지 않은 삶, 그물에 걸리지 않는 사자처럼 정처 없이 떠다니는 이방인의 삶을 자주 꿈꾸었다.


그런데 막상 진짜 이방인이 되어보니 이것은 무척 슬픈 일이었다. 나와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 껴 있을 때 느끼는 소외감, 그들의 언어를 나만 이해할 수 없다는 답답함은 한동안 나를 고통의 시간에 머물게 했다.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세상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는 것은 상상했던 것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자유와 고립의 경계 끄트머리 즈음에서 자주 흔들렸다. 나는 이곳에서 말 그대로 이방인이자 외계인(Alien에일리언: 이방인, 외계인)이었다.


돌이켜보니 외국에 살지 않아도, 같은 언어를 쓰고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사람들과 부대껴 살았을 때도 마찬가지로 이방인의 결이 만져질 때가 있었다.

한때,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네-”라고 대답하는 광고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다. 흥행 요인 가운데 하나는 현실에서 그렇게 대답하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카타르시를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상사가 옳다고 하는 것은 내 의견과 달라도 좋은 것이었다. 돈이 얽혀있으면 더더욱 고개를 숙여야 했다. 취향 같은 경우에도 비슷했다. 가령 나는 올림픽을 좋아하지 않았다. 스포츠 경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우리나라가 잘한다고 해서 막 애국심이 끓어오르며 기쁘지 않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지만, “올림픽이 싫어”라고 말했다가 행여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까 사람들이 열광할 때 같이 흥겨운 척을 했다.

남들은 다 기쁜데 나만 웃을 수 없을 때, 다수가 정답이라고 하지만 내 견해로는 틀린 것 같을 때, 전혀 공감되지 않아도 그렇다고 거짓말을 해야 할 때 나는 이방인이었다. 때때로, 어쩌면 자주 이방인의 탈을 썼다가 벗기를 번복하는 것이 사회생활의 공식이었다. 대체 오롯이 나로 살아가는 것은 왜 이렇게 힘들까?



이방인은 이해받기 어렵다. 뫼르소도 그랬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소설 <이방인>은 시작부터가 도발적이다. 엄마 사망일이 언제 인지 모른다니 누구라도 분개할 불효자식이다. 응당 슬퍼해야 할 상황이지만 그의 눈망울에서 울먹임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장례식이 끝나자 드디어 열두 시간 동안 실컷 잘 수 있겠다며 기뻐했다. 심지어 다음날엔 마리를 만나 희극 영화를 봤고 사랑의 유희까지 즐기는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일까? 이런 사람이 남자 친구라면 꽤나 마음고생을 할 것 같다. 그는 마리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널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아"라고 대답해 고구마 백만 상자를 그녀에게 선물하는가 하면, 파리 출장소에서 일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사장의 새로운 제안에도 '이러나 저라나 마찬가지'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뫼르소는 야심도 욕심도 없는 무색무취의 남자다. 만사에 심드렁했다. 의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시간은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에 등장하는 축 늘어진 시계 같았다. 누가 봐도 착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속에 없는 말은 절대 못 할 뿐이었다.


별 일 없을 것 같은 단조로운 일상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질이 나쁜 부류에 속하는 아파트 이웃 레몽, 그는 내연녀가 자신을 속인 것을 알게 되고 복수를 위해 뫼르소에게 대필 편지를 부탁한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친해지고 어느 날 뫼르소는 레몽, 마라와 함께 해변으로 여행을 떠난다. 하필이면 그날 레몽의 옛 애인의 오빠와 친구들(아랍인 무리)이 그들을 쫒고 다툼이 발생한다. 해프닝으로 마무리되는가 싶었지만 뫼르소는 총을 들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고.. 알 수 없는 분위기와 강렬한 태양에 이끌러 살인을 저지른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왜 레몽이 아닌 뫼르소가 총을 쐈을까? 그에게는 특별한 살인의 동기가 없었다.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었다. 단지 태양이 너무 눈부셨기 때문이란다. 태양이 뭐길래 살인을 저질렀을까. 살인(meurtre)과 태양(soleil)의 합성어에서 탄생된 뫼르소(meurso)라는 이름처럼 소설에서 살인과 태양은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한다. 어머니 장례식에서도, 사람을 총으로 쐈을 때도 태양은 눈부셨다. <이방인>의 작품 해설(김화영 옮김)에 의하면 죽음이 우울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햇빛이 가득한 죽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으로 태양은 진실을 의미한다고도 보인다.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추는 태양 앞에서 뫼르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재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감형을 위해 스스로를 변호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어떤 말도 거론하지 않았다. 배심원들은 살인 자체보다 뫼르소가 홀로 된 노모를 모시지 않았던 점, 장례식에서 담담했다는 점, 다음 날 여자를 만났다는 사실에 더 분노했는데도 말이다.


물론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지만 이상하게 흘러가는 재판은 읽는 이들을 답답하게 만든다. 조금씩 뫼르소가 불쌍해진다. <이방인에 대한 편지>에서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지만 뫼르소는 반대였다. 착한 거짓말을 원했던 사람들은 죽을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았던 뫼르소를 사이코로 몰아갔다. 그는 너무 정직해서 이방인이 되었다.


자신의 재판에 좀처럼 집중하지 않았던 뫼르소를 잠시 흔들리게 한 것은 예상 밖에 있었다. “제가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이라며 담당 변호사가 마치 뫼르소가 되어 1인칭 시점으로 말할 때, 그는 처음으로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사라진 다는 것은 이 남자를 동요하게 만들었다. 뫼르소에게 있어서 ‘나’로 산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런 이유로 <이방인>은 실존주의 문학으로 분류된다.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이 태어난 목적보다 인간 존재 자체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의자, 텔레비전, 창문과 같은 사물들은 용도가 있다. 앉기 위해서, 재미를 위해서,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왜 존재하는지? <이방인>은 묻는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 뫼르소는 사형 선고 후 사제가 찾아왔을 때도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신에게 기대지 않았다. 그가 믿는 것은 자신 뿐이었고, 누구나 두려웠을 죽음 앞에서조차 감정을 속이지 않았다. 진실된 나 자신으로 죽고 싶었다.

철저하게 세상에 무관심했던 뫼르소는 사형을 앞두고, 세상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때서야 비로소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나와 닮은 세계를 안을 수 있었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뫼르소의 죽음은 슬퍼 보이지 않았다. 강요된 감정이 아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삶은 후회를 동반하지 않는 까닭이다. 우리는 많은 책임과 규칙에 둘러싸여 산다. 성실해야 하고 착해야 하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보다 남들이 잘했다고 하는 일들을 처리하며 살아온 시간이 더 길었다. 내게 주어진 수많은 역할 앞에서 자유롭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이방인을 갈망하면서도 이방인이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뫼르소의 독백은 알제리에서 온 이방인으로서 절박하게 <이방인>을 써 내려간 카뮈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자, 사회의 기대와 내면의 욕구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 세상 모두의 이방인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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