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도자기를 빚는 여인을 뒤에서 껴안은 채 함께 점토를 만지작거리는 장면으로 우리의 심장을 설레게 한 영화 <사랑과 영혼>. 도자기 씬이 영화의 명장면이라면 개인적으로 명대사는 ‘동감(Ditto)’이라고 생각한다. 몰리(데미 무어)가 사랑한다고 하면 항상 동감(Ditto)이라고만 답하던 샘(패트릭 스웨이지). 몰리는 때로 왜 사랑해가 아닌 동감이라고만 하느냐며 샘을 타박했지만 동감(Ditto)은 두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괴한의 총에 맞아 죽은 샘이 영혼이 되어 몰리 앞에 나타났을 때, 그를 몰라봤던 몰리가 샘임을 확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도 다름 아닌 동감(Ditto)이었다. 두 사람에게 동감(Ditto)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그 이상의 단어였다.
나에게도 동감만큼 로맨틱하지는 아니지만 우리 둘만 이해하는 단어가 있다. 그는 가끔 나를 ‘먹새’라고 불렀다.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 "할아버지는 무슨 새가 좋나요"라는 질문에 "나는 먹새가 좋아요 “라고 답하는데, 이 장면이 인상적이었는지 이후 그에게 나는 먹새로 지칭되었다.
많은 연인들 사이에는 둘 만의 애칭이 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익숙해질수록, 그들이 나누는 언어는 사전에서 정의된 일반적인 의미를 넘어서 새로운 언어로 재생산된다. 친밀성에 기초한 우리만의 언어가 만들어지는 이 현상을 알랭 드 보통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라이트 모티프(Leitmotiv)’로 명명했다. 악보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중심 악상을 뜻하는 이 단어를 그는 같은 경험을 축적한 사람들의 관계를 특별하게 만드는 마법의 언어로 탄생시킨 것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딱히 설명하기 힘든 사랑의 현상들을 ‘라이트 모티프’와 같은 단어, 저명한 석학들의 말을 인용해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에 있다. 이는 소설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독특한 형식의 이 책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23살 여름방학 때 대학교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발견했다. 지금이야 이런 문장 형태의 제목이 유행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쏟아져 나오지만 그 당시만 해도 확실하고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는 제목이 흔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왜’라는 의문문을 붙여서 사랑하는 이유에 대한 답으로 한 권의 책을 써냈다는 점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알랭 드 보통이란 작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는데 책날개를 보니 그의 데뷔작이었다. 작가는 스물세 살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통해 화려하게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솔직히 이 대목에서 약간 질투가 났다. 아니 어떻게 이십 대 초반에 이토록 예리하게 사랑을 통찰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나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그의 깊은 내면세계에 심통이 났다. 신은 재능을 나눠주는 것에 있어서는 확실히 불공평했다. 당시 길고 나는 작가 지망생들 사이에서 한 풀 기가 죽어있었던, 마찬가지로 고작 스물세 살이었던 나는 그를 시샘하는 한편 글들에 크게 공감하며 결국 책을 구입해서 부단히 밑줄을 그었다.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와 그래픽 디자이너 클로이는 5840.82분의 1의 확률로 옆 좌석에 앉게 된다. 지나쳤을 수도 있을 우연을 운명으로 착각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행복한 나날을 이어간다. 하지만 차츰 서로를 알아가면서 불평이 생기고 의심이 쌓이면서 믿었던 운명이 깨진다. 이별 후 나는 죽을 것처럼 쓰라린 상처를 움켜쥐고 힘들어 하지만, 곧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평범한 우리에게도 일어날 법한 지루한 패턴의 연애가 책의 주된 내용이다.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로맨스에 흥미가 생기는 이유는 풀어내는 방식에 있다. 책은 뻔한 만남과 헤어짐에서 피고 지는 남녀의 심리와 사랑의 속성을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적재적소에 넣어서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역자의 설명처럼 알랭 드 보통은 다른 이의 입을 빌려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이다. 이야기와 철학을 유머러스하게 교차한 이 책은 생활 밀착형 사랑 개론서다.
작가와 함께 사랑의 시작에서부터 갈등, 이별에 이르기까지의 통속적인 흐름들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꿰뚫어 보는 경험을 했다. 대체 사랑, 너란 녀석은 무엇인지 작정하고 실체를 따져보자는 듯 사랑의 단계를 리얼하면서도 세심하게 전개해 나간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최초의 꿈틀거림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
그랬다. 사랑의 시작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콩깍지가 씌어야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군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지고, 너무 잘 알게 되면 실망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없어서 헤어진다.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헤어진 후에는 미친 듯이 슬프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상처가 아문다.
“사랑의 종말과 삶의 종말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후자의 경우에는 그대로 죽음 뒤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위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의 끝이 반드시 사랑의 끝은 아니며, 더군다나 삶의 끝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아는 연인에게는 그런 위안이 없다. ”
사랑에 빠졌을 때도, 이별을 극복 중 일 때도, 또 다른 사랑을 기다릴 때도 페이지를 넘기며 ‘맞아, 그래, 내 이야기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가령 오지도 않을 그 사람의 전화를 기다리며 속이 상할 때는 “전화는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 같은 손에 들어가면 고문도구가 된다.” 는 문장이 답답한 내 마음을 긁어 주었고, 술에 취해 다시는 사랑 따위 안 할 거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추태를 금세 잊고 다른 사랑을 시작한 나는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일 것이다.”를 통해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쉽게 빠지는 만큼 쉽게 잊는 사랑의 속성을 읽고 있자면 그 덧없음에 신물이 느껴질 법도 한데 희한하게 책은 사랑을 부추긴다. 간사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변질의 속성을 본능적으로 타고나서 변덕스럽기 이를 데 없는 그놈의 사랑이 뭐가 좋다고 또 하고 싶어 진다. <사랑과 영혼>의 샘과 몰리처럼, 이 책의 나와 클로이처럼 누군가와 오랫동안 지속적인 교감을 통해서만 만들 수 있는 너와 나의 언어유희. 그 내밀한 기쁨을 만끽하는 ‘라이트 모티프’를 만들고 싶어 지는 것이다.
“달새의 머리는 온통 달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다네. 비의 새는 온통 다음번 비가 언제쯤 내릴까 하는 생각뿐. 우리가 온 생애를 바쳐 사랑하는 그는 누구인가?”
인도의 시인 카비르가 들려주던 ‘애초의 시’처럼 우리는 전 생애에 걸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종족이다. 달만 생각하는 것이 달새의 일이라면 당신을 사랑해야 하는 일은 나의 일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직무유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