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빅토르위고
그 시절 많은 가정들이 그러했듯 우리 부모님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즈음 됐을 때 세계문학전집을 사주셨다. 당시 대부분의 집 거실에는 아이들의 독서 취향과 상관없이 세계 문학 전집과 백과사전 세트가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유행이었는데 아마 부모님은 이를 통해 자녀 교육의 질을 조금이나마 향상 시켰다고 생각하셨던 것도 같다. 전집 가운데 내가 제일 먼저 꺼내 읽은 것은 <장발장>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기보다는 꽂혀있는 책 중에 제목이 제일 짧아서 읽기 쉬울 것 같아서였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책을 덮었을 때 나는 공포에 휩싸였다.
겨우 빵을 훔친 대가로 19년이나 감옥살이를 했다니! 11살에게는 충격이었다. 19년은 엄청난 시간이었다. 내가 살아온 시간의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다는 설정이 가혹했고 절도가 육중한 범죄라고 느꼈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초등학생에게 이 책이 준 교훈은 “도둑질 하면 안된다”라는 준법정신이었다.
어린 나를 경악케 했던 <레미제라블>은 실제 사건에서 비롯됐다. 19세기 프랑스에서 한 주교가 교도소에서 막 출감한 전과자를 재워주었는데, 그는 빵 한 개를 훔친 죄로 5년간 수형생활을 한 사람이었다. 이 사건은 빅토르 위고가 펜을 들게 했고 정장 16년이란 세월 끝에 명작이 탄생했다. (작가는 1843년 딸과 사위가 센 강에서 익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10여년 동안 집필을 중단했다. 1851년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로 제정을 수립하자 이에 반대하다 망명길에 올랐는데 이 시기에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면서 1862년에 <레미제라블>이 완성된다.)
빅토르 위고 필생의 역작인 <레미제라블>은 불어로 ‘불쌍한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에는《청춘》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1914년에 처음 소개되었고, <너, 참 불상타>로 번역됐다.) 책은 제목 그대로 비참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을 대하는 사회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이 출판됐을 때 많은 노동자들은 돈을 모아서 책을 구입해 돌려 읽었다고 한다.
빈곤으로 말미암은 인간 존엄성의 훼손,
기아로 인한 여인의 추락과 무지로 인한 아이의 지적 발육 부진 등
이 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이 책과 같은 성격의 책들은 필요하다.
-레미제라블 서문
서문에는 프랑스의 행동하는 양심이었던 빅토르위고가 왜 이 책을 썼는지가 명백히 나와있다. 그가 생각하는 불쌍한 사람들의 첫 번째는 ‘빈곤으로 말미암은 인간 존엄성의 훼손’으로 대표되는 장발장이다.
안팍으로 어지러웠던 19세기 프랑스,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는 일곱 명의 조카들을 위해 빵을 훔친 남자 장발장. 그는 절도죄로 19년을 교도소에서 보내야했다. 죗값을 치루고 나왔지만 세상은 그에게 냉혹했다. 여관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고 교도소에도 다시 돌아가 보았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았으며, 개집을 찾아들었으나 개마저 물어뜯으며 쫒아냈다. 전과자라는 주홍글씨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사회가 인간을 회복할 길 없이 버리고 떠나갈 때
그것은 얼마나 슬픈 순간인가.”
짐승마저 몰아내는 매몰찬 세상 앞에 유일하게 그를 따뜻하게 맞아준 사람은 미리엘 신부였다.
“당신은 정직한 인간이 되겠다고 내게 약속했소.
나는 당신의 영혼을 산 것이오.“
가진 것 이라곤 절망과 전과자 낙인, 믿을 것이라곤 몸뿐이었던 장발장은 미리엘 신부를 만나면서 자신과 화해할 수 있었다. 그의 불행은 미리엘 신부의 관용으로 거듭났다. 장발장에서 마들렌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공장을 통해서 부를 일구고 마차에 깔린 노인을 구하면서 지역 시장 자리에까지 오른다. 온갖 차별과 질시를 받던 장발장이 존경의 대상 마들렌이 되었다.
장발장은 분명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단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을 뿐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겐 최소한의 교육이나 복지 혜택조차 주지 않았던 프랑스의 사회 구조는 수많은 하층민을 양산했다. 기회 불균등이 빚어낸 빈곤층은 비단 그 시절의 프랑스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과거에는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이 있었다. 공부만 잘하면 가난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오늘날엔 헛된 구호일 뿐이다. 빈익빈 부익부는 극으로 치 닿았고 개천에서 용나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 어렸을 때부터 질 높은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좋은 대학을 가고 대기업에 입사해서 사회의 주류가 된다. 자신들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과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한다. 이 가운데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다행스럽게도 책 속 장발장에게는 그를 보듬어준 미리엘 신부가 있었고 그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하지가 않았다. 특히 가난한 여인에게는 더더욱 냉대했다. 빅토르위고가 두 번째로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기아로 인한 여인의 추락’으로 대변되는 ‘팡틴느’가 등장한다.
그녀는 장발장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대학생의 농락으로 덜컥 임신이 됐고, 혼자 딸 코제트를 기르고 있다. 아이가 있으면 일을 못하게 될까봐 여인숙을 운영하는 테나르디에 부부에게 딸을 맡겼지만 불행히도 이 부부는 사회악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코제트를 빌미로 팡틴느로부터 온갖 돈을 다 뜯어낸다. 아이를 숨기고서라도 일을 하고 싶었던 애절함과 상관없이 그녀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이 공장에 밝혀지면서 정숙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퍼졌고 팡틴느는 쫓겨난다.
엄마는 아이를 위해 처음에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팔았고, 도무지 빈곤이 해결되지 않자 자신의 이마저 뽑아서 팔았다. 내가 성인이 되어 <레미제라블>을 다시 펴게 된 것은 바로 이 대목 때문이었다. 비싼 치과 치료가 힘든 분들에게 무료 진료를 해 드리는 취지의 의학 다큐멘터리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담당했던 출연자는 겨우 20대 중반이었으나 아이가 셋이나 있었고, 가정폭력과 스트레스로 이가 11개나 빠져 있는 엄마였다. 어떻게 해서 이가 우두두 빠져버린 것인지 그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간혹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 의사의 설명이었다. 취재를 위해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또래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보였고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이가 처음 한 두 개 빠지기 시작했을 때라도 병원을 갔다면 최악의 상황은 피했겠으나 단 한 번도 치과를 간 적이 없었다. 진료비가 걱정되어서 못 갔다. 음식을 씹지 못해서 유제품이나 음료수, 미음에 가까운 죽만 먹으면서 3년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덤덤하게 털어놓았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병원 진료비조차 쓸 수 없는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가난이 얼마나 슬픈 것인지를 느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빈곤이 있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당혹스러웠다. 하필이면 그때 치아 교정을 하고 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 이에 붙인 교정기가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도무지 그녀의 가난은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고 책임져야 할 아이가 셋이나 되었다. 딱히 전공 자격증이 없어서 일을 구하기가 힘들었고 아이들 때문에 하루 종일 집을 비울수가 없었으며 도와줄 친척이나 가족도 전후무후했다. 만날 때 마다 눈물이 났다. 20대의 여자가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보였지만 내가 감히 들어줄 수조차 없어서 또 다시 미안했다. 그나마 치료가 끝나고 마지막 촬영 때, 처음으로 보여준 미소가 아주 조금 내 죄책감을 덜어주었다.
여전히 많은 팡틴느가 우리 사회에 살고 있었다. 현실과 소설은 크게 다르지 않다. 팡틴느는 돈이 없어서 생니를 팔았고 급기야 매춘까지 하게됐고 설상가상으로 병까지 얻어 죽음을 맞이한다. 처참한 운명은 당시 가난한 여인들의 예고된 불행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거리로 나온 매춘부들에게 경멸을 퍼부었다. 팡틴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편견과 욕심으로 가득 찬 세상이었다. “편견이야말로 도둑이었고, 악덕이야말로 살인자”였다. ‘I dreamed a dream’(영화 레미제라블 OST)의 가사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꿈이 있고, 헤쳐나갈 수 없는 풍랑도 있다. 이 삶이 내가 꾸던 꿈을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팡틴느를 헤아려 준 유일한 사람은 같은 처지를 경험한 장발장이었다. 코제트를 거두어 주기로 한 장발장의 약속은 죽음을 앞둔 그녀에게 구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절망 속에 태어난 코제트는 빅토르위고가 언급하는 무지로 인한 아이의 지적 발육 부진, 세 번째 불쌍한 사람이다.
“이 처녀가 마치 햇빛에 놀랐거나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방 안에서 퍼드덕거리는 것을 보기란 참 가슴 아픈 일이다.
교육과 운명의 조건이 달랐더라면, 이 처녀의 활달하고 자유스런 행동은
아마 어느 정도 사랑스럽게 보였으리라 생각되었다.”
코제트에게 세상은 어둠 투성이었다. 두려움의 늪에 빠져있던 코제트는 장발장의 보살핌 속에서 한 떨기 장미로 피어난다. 성인이 되어 젊은 청년 마리우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지난 상처도 극복한다. 마리우스는 프랑스 민주화를 이끌어가는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코제트와 마찬가지로 미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코제트, 너는 행복하다. 내 시대는 끝났다.”
장발장은 자신의 품을 떠난 코제트를 향해, 마지막 사랑을 눈물로 떨구어 낸 뒤 숨을 거둔다.
오늘날 <레 미제라블>이 영화, 뮤지컬 등으로 각색되며 사랑받는 이유는 책 속에 표현된 프랑스의 시대상황과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둔한 리더를 둔 국가는 국민을 악으로 몰고갔다. 비참한 현실에서 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었던 민중을 폭동으로 몰아가면서 상황은 일로악화를 겪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갈수록 가난했고 부자들은 나날이 부자가 되었다. 세상은 불공평해서 빈곤 앞에 관대하지 않았다. 불쌍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양산됐고 좀처럼 벗어나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디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아야 할까? 장발장에게 그 빛은 미리엘 신부였고 팡틴느에게는 장발장이었으며 코제트에게는 마리우스였다. 결국 작가가 주장했던 인류애, 사람이 빛이었다. 우리를 어둠에 빠트리는 것도 사람이지만 꺼내주는 것도 사람이었다.
빅토르위고는 최선이 아니면 최악의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우리가 가진 선의 의지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왈칵 쏟아내던 눈물을 기억한다. 공감과 유대의 진심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늘 빛난다. 단지 부조리와 이기심, 편견에 의해 그 빛이 가려져 있을 뿐이다. <레미제라블>은 가려진 그 빛을 다시 한 번 일으켜 세우게 만든다. 불쌍한 사람들이 빛날 수 있는 세상을 그려보게 한다.
칠흑같은 밤에 별은 더 반짝이는 법이다.